응, 실패가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어
오늘도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으며 티빙으로 <유퀴즈온더블럭>을 봤다. 18년만에 시집을 내놓은 원태연 시인이 출연했다. 나도 다이어리에 저 사람 시 색색깔로 적어놓곤 했는데!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정말 예상과 다른 외모에 다른 말투, 다른 분위기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형사’라고 직업을 추측할 정도라니 말 다했지. 시집 홍보 때문에 불편한 자리 나온 티 역력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몸은 내내 배배 꼬였다. 그 와중에 자기의 삶과 글쓰기를 말하는 데에는 꾸밈없이 솔직해서, 묘한 매력이 있는 캐릭터였다.
"드라마를 너무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 되더라고요."
고작 네 권 읽고 20대에 쓴 시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작사도 하고 시나리오도 썼지만, 정말로 하고 싶었던 드라마만큼은 해내지 못했다. 결국 계약금까지 물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선금을 받아 시집을 냈는데, 그 과정도 대단히 고통스러웠단다. 2021년에 예전에 쓰던 대로 시를 쓸 수는 없는 거니까. 명색이 시인이지만, 과거의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지경에 놓인 셈이다. 이 얘기를 듣는데 왜 이렇게 공감이 가던지.
이미 시도 쓰고, 작사도 했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그 일을 못해서 왠지 떳떳하지 않은 마음. 과거의 모든 일까지 통틀어 실패한 것만 같은 기분. 그 기분이 너무나 공감이 됐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시인이 자기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태도에서 마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나는 그처럼 예전에 대단한 과거를 갖지도 못했고, 명성을 떨치지도 못했지만- 나 역시 이룰 수 없는 한 가지에 매달려서, 그게 아니면 모든 것이 실패한 것처럼 나를 위협한 적이 있었서. 나 역시 누군가 내가 쓴 책이나 콘텐츠를 언급하면 고개를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고, 온몸을 배배 꼬며 별것 아닌양 대답하곤 했으니까. 그리고 꼭 “아직 내가 진짜 쓰고 싶은 글은 못썼는데...”라고 여지를 두면서 말이다. 실제로는 그 작고 작은 일을 해내면서도 최선에 최선을 다했으면서.
성공하고 성취하지 못한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닌데도,
그 일이 결과가 좋지 못하면 어쩐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자기 PR의 시대고 아주 작은 일도 그럴싸하게 스토리텔링 해야 하는 시대인데,
그걸 포장하고 넘기지 못했고, 내가 넘지 못한 그 선들이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그를 보면서 “아니, 잘 해왔는데, 그게 저렇게 부끄러워할 일이야.”라고 할 수 있는 말을 왜 나한테는 해주지 못했나 싶고. 인생에서 이루지 못한 일은 결국 내 삶의 일부일 뿐. 내 전부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누군가가 내 일에 대해 묻는다면 적어도 이제는 바른자세로 말해야지. 성공이고 실패고 남의 기준에 맡기지 말고,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쓰고 만들어야지. "위험하지 않은 것은 위대하지 않다." 오늘 들은 마키아벨리의 명언을 새기면서 말이지.
연초에 계속 이런 글을 쓰게 된다.
아무래도 나와 화해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