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물 이게 뭐라고, 사람 고독하게까지 하고
오늘은 콧물에 대하여 쓴다. 독한 약에 취해서 쓴다. 콧물 우습게 보면 안된다. 언제나 내 발목을 붙잡은 것은, 나의 성적 경쟁자도, 연애 경쟁자도 아니었다. 그놈의 콧물이었다.
나에게는 오래된 질병. 알레르기 비염이 있다. 워낙 흔한 알레르기라, 겨울에 누구나 비염 증상 겪지 않나? 대수롭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나의 비염과 콧물에는 지난한 역사가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고등학교 시절, 한기를 느끼면 콧물을 흘렸다. 감기와는 다른 증상이었다. 묽은 콧물이 쉴새없이 흘렀다. 하도 콧물이 많이 쏟아져서, 휴지로 코를 막고 있어도 금새 휴지가 축축해지고, 차가워졌다. 목이 막힐 지경으로 쏟아지고 숨도 쉬기 어렵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에게 비염은 너무 가혹했다. 누구처럼 시험지에 코피는 쏟아본 적 없지만, 콧물은 여러번 쏟았다.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그날 공부는 공친 거나 다름 없었다. 콧물을 멈추려면 독한 알레르기 약을 먹어야 하고, 그 약을 먹으면 정말 뇌가 약기운에 주물러지는 듯 멍해졌다. 그렇게 한숨 자고나야 일이 끝난다. 하지만, 그날의 일일 뿐이다. 다음날 또 콧물이 쏟아지면 끝이었다. 집중력도 절박함도 콧물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었다.
수능을 앞둔 고3시절. 초조해졌다. 수능날 콧물이라도 터지면 시험이고 자시고 그냥 끝이었다. 두려운 마음에 병원 여러 곳을 수소문했다. 명동에서 비염 알레르기를 일시적으로 멎게 하는 호르몬 주사를 맞았다. 하지만 일시적이었다. 3개월이라고 했지만, 거듭 맞을 수록 유지되는 기간이 줄었다. 무엇보다 호르몬 주사라 주사를 맞고 나면 생리 주기가 들쭉날쭉 해져서 기분이 나빴다. 이비인후과를 제아무리 돌아도 양약으로는 잠으로 증상을 멎게 하는 것 뿐이라 한방 쪽을 돌았다.
성남 어딘가에서 용한 한의원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거기서 말하길 비염 증세는 뇌에 피고름?이 축적?되어 그런? 것이라고. 코에 호스를 꼽아 머리쪽에 고름을 빼내면 된다고,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하겠다고 했지? 싶은데 그때는 심사숙고 해서 치료를 받았다. 한의원에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코에 호스를 꼽고, 머리 어느 쪽에 고여있는 피고름을 뽑아냈다. 어휴 끔찍해. 그 끔찍함보다 이 방법까지 썼는데도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치료를 마쳤지만 썩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꾸준히 뭔가 계속 몸관리, 환경관리를 했기 때문에, 그럭저럭 고3의 겨울은 무사히 넘겼다. 수능 날에도 다행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시절. 여자친구들도 남자친구들도 늘 내가 코를 찔찔 흘리고 다니던 모습을 기억할 테다. 또 터졌다! 그날은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 휴지를 껴안고 누워있어야 했다. 그래도 점점 나이가 들수록 그런 날 수가 적어졌다. 뭐지? 이제야 치료효과가 나오는 건가? 다른 비염환자들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하고. 그러면서 '어라? 나 요즘은 콧물이 나지 않네?' 싶어서 신기해했고, 며칠 전에도 남편에게, 어머 나 요즘엔 바람이 부는데도 콧물이 나지 않네?라고 말했,
는데 오늘 드디어 터졌다.
아주 오랜만에. 아침에 출근해서 회사에 앉아있는데, 도무지 콧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훌쩍거릴 필요도 없이 쏟아지는 콧물이기 때문에, 마스크 쓰고 새근새근 입으로 숨을 쉬는 나를 보고 다들 그러려니, 했겠지만, 마스크 뒤로 나는 치욕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코를 풀고 싶지도 않았고, 티를 내고도 싶지 않았지만, 내심 누가 내가 지금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싶었지만, 우리는 어른이 아닌가. 누가 알아주리오? 내 입으로 말해야지, 결국 마스크까지 다 젖어 버려서 내 입으로 말했다. 도저히 앉아있기 어려운 상태니 오늘은 조퇴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아프면 스스로 말해야 한다.
가만히 콧물을 흘리며 생각한다. 콧물 이게 뭐라고.
하지만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렇다. 콧물이 쏟아지면, 정말 나는 꼼짝할 수 없나?
만약 내가 교실이나 회사같은 어느 공간에 귀속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콧물을 해결하기 위한 최적의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바로 약을 먹고 눈을 붙이거나, 내 몸이 좀더 편안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지. 공간의 제약이 사라지면, 콧물의 제약에서도 조금 벗어날 수 있구나. 점점 거동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해야되겠...콜록콜록.
오늘 마스크를 쓰고 혼자 콧물을 흘리며 가만히 일하고 있는데 고독했다.
콧물 이게 뭐라고.
고독하게까지 하냐고.
콧물은 늘 혼자 흘리니까. 감기는 애취애취 주변사람들에게 '나 감기 걸렸소' 알리기라도 하고 '어서 들어가 봐'라는, 여러 의미가 함축된 ("옮을 수도 있잖아^^" 혹은 "기침 소리 들으면 무슨 일이라도 날까봐 걱정돼") 말이라도 듣지만 콧물은 그저 혼자 묵묵히 감당해야 할뿐. 스스로 상황을 정리해야 할뿐이다. 어디선가 혼자 콧물을 흘리고 있을, 만성 비염 동지들을 위해 긴 글을 썼다. 이제 약 먹으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