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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 Oct 13. 2023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때

(19)

응급실에 도착했다. 혹시 또 거부당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 병원에서 수술을 세 번이나 하고, 항암치료도 매번 했는데 응급실에서 안 받아줄까 걱정해야 하다니. 역시 갑 오브 갑은 대학병원이다. 응급실 앞 간호사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엄마가 항암치료를 하고 며칠째 엄청 진짜 심각하게 설사를 계속 계속 하세요. 정신도 거의 못 차리시구요.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받아주실 수 있나요? 제발요."


간호사가 어깨너머로 엄마를 보더니 말했다.


"설사를 며칠째 하셨어요? 에고 좀 더 일찍 오시지. 저렇게 힘들 때까지 버티셨어요?"


"네 혹시 안 받아주실까 봐..."


"항암치료 중에는 이상 있으면 바로 오셔야죠. 다음부터는 일찍 오세요."


간호사의 친절한 태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편은 내게 먹을 음식을 잔뜩 사다 주고 아기를 보러 떠났다. 그가 없었다면 엄마를 병원에 다시 옮길 용기를 못 냈겠지.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엄마는 응급실 침상을 바로 배정받았다. 휠체어에서 침대로 옮긴 후 엄마는 죽은 듯이 잠들었다. 수액 바늘과 소변줄을 꽂을 때 움찔하며 작은 비명을 질렀을 뿐 이후에는 입도 뻥긋 안 했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던 엄마는 이제 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난번 엄마랑 응급실에 왔을 땐 얇고 불편한 원피스를 입은 탓에 감기몸살에 걸려 몇 주를 앓았다. 이번엔 병원에 올 경우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다. 통 넓은 바지에 티셔츠, 거의 다 해져 아무렇게나 구겨 신기 좋은 운동화를 신었다. 추울까 봐 두꺼운 가디건도 들고 왔다. 엄마가 깊이 잠든 틈을 타 매점에 내려가 특대형 기저귀 두 팩과 물티슈 세 팩을 사왔다. 응급실 간병 세 번째면 이 정도 짬은 생긴다.


간호사들이 갖가지 검사를 진행하는 동안 주삿바늘을 통해 수액, 진통제, 승압제가 투여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태는 금방 좋아지지 않았다. 승압제를 투여해도 혈압이 많이 오르지 않았다. 엄마는 자는 중에도 계속 설사를 해서 기저귀를 여러 번 갈아야 했다. 변은 새까맣고 덩어리가 없는 액체 상태였다. 냄새도 나지 않았다. 엄마는 불러도 깨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숨을 가쁘게 몰아쉴 뿐이었다. 얼굴은 요양원에서보다 한층 더 검게 변해 있었다.


문득, 이런 모습을 예전에 봤던 기억이 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대장암과 당뇨로 투병하시던 할아버지의 임종 직전, 아홉이나 되는 자식들이 모여 할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나는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엄마가 불러서 들어갔다.


병실에서 본 할아버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할아버지는 깡마른 얼굴에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입을 벌린 채로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꺼허허헉, 꺼허허헉. 할아버지의 마른 가슴은 마지막 숨을 놓칠 새라 필사적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이모들이 할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잡고 따뜻한 말을 건넸지만, 할아버지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오직 숨만 몰아쉴 뿐.


난 무서워져서 금방 병실을 나왔다. 그때까지 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드라마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드라마에서는 "얘들아 잘 살아라. 그동안 고마웠다. 행복해라..."하고 고개를 옆으로 떨구며 얌전히 숨을 거뒀다. 그러면 자식들이 엉엉 울면서 방금 전까지 아버지였던 사람을 껴안고 화면이 페이드아웃 되었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삶의 마지막을 쉬이 놓지 못하고 끝까지 숨만 들이마시고 있었다. 자식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못 남기고.


엄마의 상황은 더더욱 우당탕탕 엉망진창에 가까웠다. 암이 계속 재발하고, 거동이 힘들어지고, 머리를 열어 암덩어리를 빼내고, 방사선으로 뇌를 쪼이고, 기억을 잃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자식들이 여러 번 밤에 뛰어가고,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가 주삿바늘로 온몸을 찔리며 서서히 죽음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가 유난히 힘든 과정을 겪는 걸까? 아니면 내가 처음이라 그렇지, 현실에서 죽음은 원래 이렇게 오는 걸까?  



만 하루가 지나도 엄마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다. 24시간 동안 엄마가 깨어 있는 시간을 합하면 단 10분도 안 됐다. 응급실에 들어올 때만 해도 엄마가 여기서 퇴원하면 요양병원에 입원시킬 작정이었다. 수액이라도 매일 맞혀 기력을 되찾게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암 카페에서 찾아본 바에 따르면 엄마의 증상은 임종 증상과 흡사했다. 연하능력 쇠약, 대변실금, 밤낮이 바뀌며 섬망 발생, 저혈압... 며칠 전 엄마가 뜬금없이 미국에 있다고 한 것과 용변 보는 법을 잊은 게 생각났다. 39에 70밖에 안 되던 혈압도. 엄마의 마지막이 이곳 G대학병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엄마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가슴이 무너져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암 카페에서 요양병원 정보를 찾던 나는 이제 호스피스 글들을 정독했다. 호스피스는 말기 암 환자들에게 웰다잉을 위한 좋은 시스템인 것 같았다. 말기 암 환자의 암성 통증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로도 잡히지 않는 통증을 겪다 보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호스피스에서는 이런 환자들에게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고 통증을 적절히 관리해 줘 삶을 잘 정리하게 돕는다. 아직 우리나라에 호스피스가 많지는 않아서, 평이 좋은 호스피스는 대기가 몇 달에 달할 만큼 길었다. 따라서 병원에서 한창 치료를 받고 있으면서도 혹시 몰라 대기를 걸어두는 사람도 있었다.  


호스피스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 있다. 아무리 길어도 2~3달을 넘기지 못한다. 그래서 사망하지 않더라도 정해진 기간이 넘으면 퇴소해야 한다. 이 때문에 생긴 웃픈 사연도 있었다. 임종이 임박한 아버지가 호스피스에 입소했는데, 상태가 조금씩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며 몇 주를 버텼다. 자식은 모든 휴가를 몰아 써서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실컷 울고, 이야기도 나누고, 마음의 정리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는 거다. 이제 휴가를 모두 소진해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호스피스 퇴소일이 다가오고 있다. 아버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으면 일반 병원으로라도 옮기겠지만, 여전히 목숨만 가늘게 이어가는 상태다. 자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길 원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아버지가 대체 언제 돌아가시나' 하고 내심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죽음과 관련된, 숭고하지 않은 현실적 이야기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냥 죽음 자체만이 있을 뿐. 죽음도 삶과 똑같이 현실이다.


나는 엄마에게 죽음을 준비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덟 명이나 되는 엄마의 형제들이 엄마의 마지막 얼굴도 못 보고 보내선 안 됐다. 요양원에서 면회를 못 오게 해서 엄마 얼굴을 못 본 이모들도 있었다. 엄마가 이렇게 가버리면 이들이 얼마나 비통해할까. 특히 이모들과 엄마는 평소 사이가 각별했다. 엄마를 보여주는 건 엄마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모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쉽지는 않았다. 코로나 방역으로 인한 규칙이 여전히 엄격했기 때문이다.


- 상주 보호자 1인으로 제한


- 상주 보호자는 최대 72시간 전에 받은 PCR 검사 음성 결과지 지참


- 상주 보호자가 한 번이라도 병원 밖으로 나가면 PCR 검사를 새로 받아야 함


- 잠시라도 상주 보호자를 변경했다가 다시 상주 보호자로 지정되려면 PCR 검사를 새로 받아야 함. 즉, 내가 기본적으로 병원에 있고 다른 사람이 엄마 얼굴을 잠시 보게끔 상주 보호자 자격을 잠깐 넘겼다가 내가 다시 이어받을 수 없음. 일단 자격을 넘기면 내가 PCR 검사를 다시 받고 다음날 음성 결과가 나와야지만 병실에 들어갈 수 있음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이모들이 돌아가면서 바톤터치 하며 상주 보호자로 등록해서 엄마를 보면 된다. 관건은 이들의 방문 시간을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게 할 수 있느냐였다.


나는 제일 먼저 세탁소를 운영하는 미주 이모에게 전화했다.


"미주 이모, 엄마... 아무래도 오래 남지 않은 거 같아. 이제 마지막인 것 같아. 지금 코로나 방침 때문에 얼굴이라도 보려면 상주 보호자로 등록하고 들어와야 하거든? 코로나 검사는 전날 받아야 하고."


"그래 류미야, 이모가 갈게. 언제 가면 돼?"


"음 내일 아무 때나 와서 있다가 다른 이모가 오면 교대해 주면 돼. 언제부터 언제까지 있을 수 있어?"


"지금 일하시는 분이 손을 다쳐서 못 나오고 있거든. 보자... 내가 밤 8시에 가서 아침 6시까지 있을 수 있어."


"응 알겠어. 다른 이모들에게 전화해 보고 순서를 짜볼게."


엄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하면 앞다퉈 올 거라 믿은 이모들이, 갖가지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만약 코로나 검사도 필요 없고 아무 때나 와서 원하는 만큼 있을 수 있었다면 다들 당연히 왔을 것이다. 하지만 생업 때문에 톱니바퀴 맞추듯 서로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엄마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든 하루는 오지 않을까?'하고 기대했던 이모들은 결국 한 명을 제외하고는 병원에 오지 못했다(그 이모는 이틀 밤낮 동안 엄마를 극진히 돌봤다). 서운한 마음이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잘못된 건 융통성 없는 병원의 코로나 방역 지침이지, 사느라 바쁜 이모들이 아니다. 오빠와 내가 엄마를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던 것처럼,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역시나 좀 속상했다. 자매들끼리 그렇게 돈독하고 살갑게 지냈는데, 엄마의 마지막이 이렇게 외롭고 초라할 일인가? 괜시리 눈물이 나와서 코를 크게 훌쩍였다.


"너 왜 울어."


엄마가 눈을 번쩍 뜨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 나 하품해서 콧물 나와서 그래. 이제 정신이 들어?"


"아휴... 나는 괜찮은데 너가 힘들어서 어쩌니..."


엄마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자식 훌쩍이는 소리는 기가 막히게 듣는 우리 엄마. 죽을 때까지 자식 걱정하는 우리 엄마.


엄마... 너무 미안해. 내가 정말로 잘못했어... 화장실로 가서 엉엉대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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