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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 Oct 11. 2023

엄마를 살리러 다시 길을 나서다

(18)

아기 돌잔치 날이었다. 양가 직계 가족만 초대해 식사 자리를 가졌다. 엄마는 참석하지 못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지난주에 방사선과 항암 치료를 시작하고 컨디션이 급속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밤새 대여섯 번씩 울리던 전화도 이제 거의 오지 않았다. 전화가 빗발칠 때는 돌아버릴 지경이었지만, 전화가 오지 않으니 이것 또한 걱정이었다. 엄마의 컨디션이 전화도 못 걸 정도로 안 좋은 걸까?


전날 저녁,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가 밥을 거의 못 드셔. 오늘 아침에도 내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죽 세 숟가락 잡쉈어. 좀 드셔야 할 텐데... 엊그제부터 설사를 심하게 해서 계속 이 상태면 위험할 수 있어요. 병원에서 준 지사제 복용하기 시작했으니 좀 두고 보기로 해요."


병원에서 준 항암치료 부작용 안내지에 설사 증상이 있었다. 지사제 복용 후에도 심한 설사가 3일 이상 지속되면 내원하라고 했는데. 그래도 이틀 째니까 요양보호사 말대로 조금만 두고 보자. 엄마의 회복력을 믿고 싶었다.


돌 사진을 찍으러 온 기사가 우리 부부와 아기 사진을 찍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양해를 구하고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엄마? 몸은 좀 어때?"


"응 견딜만 해. 저녁 먹었니?"


아침인데.


"으응…. 엄마 밥은 먹었어?"


"저녁 먹었지. 있잖아, 너무 이상해. 나 지금 미국이야. 비행기 탄 기억도 없는데 미국에 와 있어."


이건 또 뭐야. 이제 뇌가 제기능을 아예 못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장단을 맞춰줘야 할까, 아니면 현실을 일깨워줘야 할까?


"지금 미국이야? 누구랑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야. 여행 온 것 같은데, 왠지 예전에 너랑 여행할 때 갔던 호스텔 있지? 거기 같애. 캐나다에 있던."


엄마는 어제까지 같이 있던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왕 온 거니까 여기서 여행 좀 하다 갈게. 구경 다 하고 동민이(뇌졸중 걸린 요양원 남자친구) 운동화 한 켤레 사갈 거야.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 동민이 걸음 연습시켜서 걷게 해줄 거야. 젊은 나이에 걷지도 못하고 얼마나 안타깝니."


엄마는 젊어서 뇌졸중에 걸려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요양원 남자친구가 많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어... 그래 엄마. 피곤할 텐데 틈틈이 잠도 자구."


"그래, 전화비 많이 나오겠다. 끊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원인을 파악해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텐데, 아무것도 확실치 않았다.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날이 엄마의 몸과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양보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미실 어르신 딸입니다. 엄마가 이상한 것 같아요."


"네 이상해요. 갑자기 인지가 확 떨어졌어. 좀 아까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서 데려다줬더니, 용변을 어떻게 보냐고 물어. 너무 깜짝 놀랐어. 하루 만에 사람이 이렇게 되나 참."


"그래서 용변은 보셨어요?"


"내가 도와줘서 해결했어요. 우리도 난감해요. 일반적인 치매도 아닌 것 같고... 설사는 좀 잦아들었어요. 식사는 여전히 안 해서 억지로 몇 숟가락 떠먹여 줬고."


엄마... 60년 넘게 인간답게 생리현상을 처리했는데 한순간에 잊으면 어떡해. 더 이상 퇴화하지 마 제발... 미국에 있다고 하질 않나 화장실 가는 법을 까먹질 않나, 엄마의 변화는 매번 상상초월이었다. 늘 안 좋은 쪽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나였지만, 내 상상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요양원에서 빼내달라고 난리 칠 때가 차라리 나았으려나?


이후 이틀간 전화가 없었다. 다시 불안한 평온이 찾아왔다. 예전의 나라면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먼저 연락했겠지만,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싶었다. 상태가 많이 심각하면 요양원에서 연락이 오겠지.


그러나 그다음 날에도 엄마에게서 전화가 안 오자 온갖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죄책감이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엄마를 모른 척하는 내가 끔찍했다. 용기를 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


엄마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엄마? 괜찮아?"


"응.. 좀..ㄴ.."


"응? 안 들려."


"좀... 나아..."


엄마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모기 소리만 했다. 좀 낫긴 뭐가 나아. 목소리까지 안 나오는구만. 순간 눈물이 고였다.


"엄마, 옆에 사람 있으면 바꿔줘."


"여보세요? 나 원장이에요. 엄마가 말을 잘 못하네. 힘이 없어서 그래."


원장이었다.


"어르신이 지금 많이 안 좋아. 기운 없어서 누워만 있고 밥도 거의 못 드셔."


"어떡하죠? 어디가 안 좋아요?"


"설사가 심해요. 좋아지나 싶더니 어제 아침부터 또 시작했어. 혈압도 낮아서 오전엔 39에 70이었어. 잠깐 기다려 봐. 영상통화 해줄 테니까 직접 봐요."


평소 저혈압인 나도 60에 90은 나오는데, 39에 70이라니. 원장에게서 온 영상통화를 수락했다. 화면이 켜지고 누워 있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핏기 없이 바싹 마른 얼굴에 감은 눈, 반쯤 벌어진 입으로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엄마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치 산 송장 같았다.  


"제가 지금 갈게요."


"안 좋아 보이지? 급할 건 없으니 준비해서 천천히 와요. 아니면 오빠 오라고 해. 딸은 아기 때문에 힘들지 않아?"


"오빠 지금 출장 갔어요. 남편 휴가 쓰고 오라고 하면 돼요. 좀 이따 뵙겠습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있잖아. 엄마가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방금 원장이랑 통화했는데..."


영상통화로 본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나는 뭘 하고 있었나. 엄마는 몸이 저 상태여도 내가 걱정할까 봐 좀 낫다고 말했는데, 나는 나 살자고 엄마를 모른 척하고 있었다. 지독한 자기혐오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류미야, 침착하게 말해 봐. 장모님이 어떠신데?"


남편의 목소리를 듣자 목이 메었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슬퍼서 숨이 막혔다.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어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쉴 새 없이 흐느꼈다.


"장모님 많이 안 좋으신 거지? 같이 가자. 지금 휴가 내고 집으로 갈게."


"아냐... 흑.. 혼자..."


"같이 가."


"그럼 애기... 흑."


"애기는 엄마한테 맡기면 돼. 엄마집에 들러서 애기 내려다 주고, 곧장 A시로 가자."


"고마...워."


"뭘. 금방 갈게."


흐느끼느라 제대로 대답을 못해도 남편은 다 알아들었다. 내 엄마니까 이런 일은 나 혼자 감당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함께해준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혼자 감당한다고 꽁꽁 싸매고 있어서 더 힘들었나보다. 힘든 일을 조금 나누고 기대니 훨씬 마음이 좋아졌다. 처음으로 남편과 가족으로서 유대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아기를 시어머니에게 데려다주고, 우리는 A시로 향했다. 7시 반쯤 되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이라 그런지 노을이 장관이었다. 온통 황금빛 석양으로 물든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절망스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이 순간 모든 풍경이 완벽했다.


멋진 황금빛 풍경은 길지 않았다. A시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엔 주변이 온통 깜깜해져 있었다. 요양원 마당에 차를 대고 내렸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불이 꺼져 있고 거실에만 작은 등이 켜져 있었다. 출입문으로 가서 노크했다. 요양보호사가 우리를 맞았다.


"오미실 어르신 따님이죠? 이리 오세요."


우리는 그녀를 따라 엄마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영상통화했을 때와 동일하게 메마른 모습으로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미실 언니, 일어나 봐. 딸 왔어."


엄마가 감은 눈을 떴다.


"어...어...하아."


엄마가 힘없이 손을 흔들며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히 기쁘게 웃었다. 달싹거리는 입술은 내 이름을 발음하지 못했다.


"왔어요?"


원장이었다.


"남편 분은 여기 있고, 따님만 잠깐 와서 나랑 얘기해요."


원장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하고 싶어?"


"어...떤 걸요?"


"엄마를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아까 오빠한테도 전화해서 얘기해 봤는데, 한 일주일만 더 두고 보고 싶대. 그때도 안 좋으면 병원으로 옮기는 걸로."


"그래요? 근데 그래도 되려나 모르겠어요. 상태가 좀 심각하신 것 같거든요."


"그럼 딸이 결정해. 엄마 병원으로 데려갈지 말지."


만약 엄마가 이곳을 떠나 병원에 입원하면, 다시는 못 돌아오지도 모른다. 그동안 엄마는 이곳에서 충분히 트러블 메이커 역할을 했고, 요양보호사들이 항암치료하는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힘들다고 대놓고 불평했기 때문이다. 있는 사람을 쫓아내기 쉽지 않지만, 이미 나간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는 건 쉬운 일이다.


안 받아준다고 다른 요양원으로 옮기기도 애매했다. 엄마는 요양등급이 없었기 때문에 받아주는 요양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 오빠도 이런 이유로 요양원을 나와 병원에 가는 걸 꺼렸을 것이다.


나는 결정해야 했다. 만약 지금 엄마를 병원으로 옮기면 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응급실로 밀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엄마 간병은 다시 내 몫이 된다. S병원 응급실과 G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엄마를 간병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나는 한번 더 망설였다. 오빠가 일주일만 더 두고 보자고 했잖아. 나도 그에 동의하면 어떨까? 그럼 오빠도 출장에서 돌아올 테고, 내가 독박 간병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엄마가 그동안 기적적으로 좋아질지도 모르니까.


원장에게 생각해 본다고 말하고 엄마 방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숨을 몰아쉬며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어쩌면 의식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지도. 나는 남편 옆에 앉아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일주일은커녕 이틀도 못 버틸지 몰랐다.  


엄마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었다. 엄마를 요양병원에 옮겼을 때처럼, S병원 응급실로 옮겼을 때처럼, 그리고 G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을 때처럼.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남편, 나 엄마를 병원으로 옮겨야겠어."


"잘 생각했어."


원장에게 엄마를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일사천리였다. 요양보호사와 원장이 엄마의 짐을 싸고 가는 길에 마실 물과 간단한 과일을 싸줬다. 혹시 가는 길에 설사를 할까 봐 기저귀를 두 개나 채웠다. 엄마를 침대에서 일으키자 엄마가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나 이제 집에 가?"


"응... 일단 병원 갔다가."


"그래 가자... 여기 짐 다 두고 일단 나가자. 얼른 가자. 얼른."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와중에도 엄마는 이곳에서 나간다는 사실에 작게 흥분했다.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어두운 거실로 나왔다. 아무도 없던 거실에 누군가 나와 있었다. 휠체어를 탄, 엄마의 요양원 남자친구였다. 그는 켜져 있지도 않은 TV 쪽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데 거실에서 뭘 하는 걸까? 물이라도 마시러 나오셨나?


출입문으로 가려면 동선상 그의 앞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휠체어를 조심조심 밀고 그의 앞을 지나가는 순간, 그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안녕! 안녕!"


깜짝 놀라서 보니 그가 엄마에게 손을 뻗어서 인사하고 있었다. 말을 아예 못 하시진 않는구나.


"엄마, 남자친구가 인사하네."


엄마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선 그의 손을 힘없이, 그러나 두 번을 분명하게 하이파이브 해주었다. 엄마가 하도 말을 많이 걸어서 피해 다녔다더니, 그래도 정이 들었나 보다. 가슴이 찡해져 왔다.


이제, 엄마를 살리러 다시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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