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미 Oct 16. 2023

MZ는 베이비부머를 부양할 수 있을까

(20)

“많이 좋아지셨네요.”


의사가 말했다.


“근데 왜 정신을 못 차리실까요? 미음을 떠 먹여드리면 삼키기도 전에 다시 잠드세요. 목으로 넘기지도 못하구요.“


“워낙 안 좋으셨어서 그렇죠. 수치들이 정상 수준으로 돌아오고 있으니 좀 기다려 보세요.”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고 3일째. 엄마의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검은 설사는 여전했지만, 잠에서 깨어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처음엔 1분, 그다음엔 5분, 그다음에는 20분…. 목소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눈의 초점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엄마가 계속 죽은 듯이 자는 바람에, 나는 간이침대에서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엄마는 지금까지 중 가장 상태가 안 좋았지만, 반대로 나는 가장 편한 병원 생활이었다.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간, 누워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류미야….”


“어… 엄마? 괜찮아?”


드디어 엄마가 바람 빠지는 소리가 아닌 진짜 목소리를 냈다.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말을 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엄마가 살아난 것이다.


“나 답답해….”


“응 엄마. 엄마 너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어. 기억나? 몸 괜찮아지면 금방 퇴원할 수 있어.”


“답답해….”


잠깐이라도 나갔다 와야 하나? 그러나 이 시간에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엄마 일단 좀 자. 밤이 늦어서 못 나가. 날 밝으면 휠체어에 태워서 돌아다닐게.“


“응….”


엄마가 다시 잠들었다. 잘 됐다. 정말 잘 됐어. 하여튼 우리 엄마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니까. 나는 들뜬 상태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내일 아침에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한 바퀴 돌아야지. 병실만 잠시 나갔다 와도 좀 나을 거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미야. 류…미야.”


엄마 목소리였다. 눈을 번쩍 떴다.


“어? 엄마? 왜? 어디 안 좋아?”


“나 답답해. 나가고 싶어.”


새벽 4시였다.


“엄마… 지금 다들 주무셔서(5인실) 부스럭대면 안 되고, 나가도 갈 곳이 없어. 조금만 더 자. 응?“


“나가고 싶어. 답답해서 미치겠어. 옥상으로 가자.”


“에휴… 알았어.”


죽다 살아났는데 뭔들 못 해주겠어. 복도에서 휠체어를 끌고 들어왔다. 침대 옆 거치대에서 소변 주머니와 수액병을 들어 휠체어 받침대에 걸고 엄마를 부축해서 앉혔다. 엄마가 몸에 힘을 줄 수 없어서인지, 이젠 28킬로밖에 안 나가는데도 너무 무거웠다. 소변줄과 수액줄을 잘 정리해서 한쪽에 걸었다.


휠체어를 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멋진 야경이었다. 예전에 우리가 살던 동네도 멀리 보였다.


"류미야… 우리 병원 바로 앞에 살았었지?"


"바로 앞은 아니고 버스 타고 20분 거리였지."


엄마는 말이 없었다. 기운이 없어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나 추워. 들어갈래."


"그래, 엄마. 들어가자."


휠체어를 끌고 병동으로 내려갔다. 소변 주머니와 수액병을 빼서 침대 옆 거치대에 걸고 엄마를 조심조심 침대로 옮겼다. 엄마는 지친 듯 눈을 감았다.


"나 추워."


"응 엄마. 이불이랑 담요 덮어줄게."


끊임없이 추워하는 엄마를 위해 담요를 얻어와 위에 덮어줬다. 엄마가 편히 자고 빨리 회복하기를. 그래서 원하는 대로 얼른 병원에서 나가기를.


30초 후, 엄마가 말했다.


"류미야 나 더워."


"응 엄마. 담요 걷어줄게."


담요를 걷어서 발 밑에 놓아주었다.


30초 후, 엄마가 말했다.


"류미야 나 추워."


"응 엄마 담요 다시 덮어줄게."


발 밑으로 밀어놨던 담요를 다시 덮어주었다. 엄마는 불편한지 살짝 인상을 쓰고 다시 눈을 감았다.


1분 후, 엄마가 말했다.


"류미야 나 답답해. 밖에 나가고 싶어."


"엄마, 5분 전에 나갔다 왔잖아. 또 나가고 싶어?"


"응 나갈래.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래 나가자."


나는 복도로 나가서 휠체어를 끌고 들어와 엄마를 조심조심 부축해서 휠체어에 앉혔다. 소변 주머니를 옮기는 걸 잊어 하마터면 소변줄이 뽑힐 뻔했다.


"엄마, 헉헉. 다 됐어. 이제 나가자."


다시 휠체어를 끌고 옥상으로 나갔다. 나는 앉을 자리가 없어 엄마 옆에 서 있었다. 엄마는 아까처럼 또 멍하니 먼 곳만 바라봤다.


"나 언제 퇴원해?"


"다 나아야 퇴원하지. 아직 설사하잖아. 밥도 잘 못 먹고."


‘퇴원해봐야 또 요양원에 갈 텐데'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다시 말이 없었다.


5분 후, 엄마가 말했다.


"나 힘들어. 들어갈래."


"그래, 들어가자."


휠체어를 끌고 다시 병동으로 내려갔다. 엄마를 휠체어에서 일으켜 침대에 눕히고 소변 주머니와 수액병을 거치대에 걸었다. 다시 휠체어를 복도에 내놨다. 아침 6시도 안 됐는데 벌써 녹초가 된 느낌이었다.


"류미야, 나 추워."


"응 엄마, 담요 덮어줄게."


나는 담요를 꼼꼼히 덮어주었다.


"엄마 이제 좀 자. 푹 자야 금방 회복하고 퇴원하지."


"응."


엄마가 눈을 감더니 약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드디어 잔다.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았다. 조금 쉬어야지.


3분 후, 엄마가 말했다.


"류미야, 나 답답해. 나갈래."


짜증이 확 났지만, 최대한 억누르고 말했다.


"엄마… 10분 전에 나갔다 왔잖아. 힘들다고 해서 들어왔고. 그냥 자는 게 낫지 않을까?"


"나 방금 푹 잤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해. 나갈래."


나는 다시 복도에서 휠체어를 끌고 들어왔다. 엄마를 앉히고 소변 주머니와 수액병을 휠체어에 걸고 조심조심 움직여 엄마와 옥상에 갔다. 10분 후 엄마가 힘들다고 말했고, 나는 휠체어를 밀고 병동으로 내려와 엄마를 침대에 옮기고 수변 주머니와 수액병을 들어 거치대에 걸고 휠체어를 복도로 내놓았다.


그 후로 5시간 동안, 나는 일곱 번을 더 엄마를 끌고 옥상에 왔다 갔다 했고, 백 번이 넘게 담요를 덮었다 내렸다 했다. 엄마가 여덟 번째 나가자고 했을 때,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엄마! 나가면 들어오자고 하고, 들어오면 나가자고 하고, 담요 덮어주면 덥다고 하고, 치워주면 춥다고 하고 어쩌라는 거야! 진짜 나한테 왜 그래! 나도 힘들어! 잠을 좀 자, 잠을!"


"잠이 안 오는 걸 어떡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란 말야. 나가고 싶어."


"아 몰라 엄마 혼자 나갔다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엄마에게 짜증을 확 내고 병실을 나갔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왜 엄마에게 짜증을 냈지? 난 왜 이렇게 이해심이 부족할까? 그게 뭐라고 못해줘. 엄마를 살려주면 뭐든 다 하겠다고 기도했잖아. 사경을 헤매면서도 내가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뜬 엄마잖아. 앞으로 엄마가 하자는 건 다 해주자. 노가다 왔다고 생각하고.


결심이 무색하게, 엄마가 퇴원하기까지 3일 동안 인내심의 한계가 자주 찾아왔다. 가장 미칠 것 같던 순간은 금식 때 음식을 달라고 고집 피웠을 때다. 대변 검사 때문에 이틀간 금식하라고 했는데 엄마는 밥을 달라고 끊임없이 졸랐다. 안 된다고 좋게 설명하고, 간호사가 달래고, 병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조금만 참으라고 설득하는데도 어림없었다. 나중에는 5분에 한 번씩 화를 내고 협박하다가, 본인이 직접 매점에 가서 빵이랑 커피를 사 먹겠다고 침대에서 내려오다 크게 넘어질 뻔했다. 나는 또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그리고 후회했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했다.


엄마가 살아나서 너무 좋았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괴로웠다. 어딘가 익숙한 괴로움이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엄마는 퇴원을 간절히 바랐지만, 퇴원 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건 요양원이었다.


"원장님, 엄마가 많이 좋아지셨어요. 곧 퇴원하실 거 같은데… 요양원에 다시 모셔다 드리려구요."


"다행이에요. 우리가 기도 많이 했어. 아휴 정말 다행이야... 엄마도 고생이지만 딸도 너무 고생 많았지. 엄마는 우리가 돌볼 테니까 모셔다 줘요."


전화를 끊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병원 지옥에서 벗어나자마자 요양원 지옥 시작이다. 간신히 살아났는데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엄마는 얼마나 기가 막힐까. 지금껏 누구보다 삶을 즐기고 새처럼 자유롭게 살던 엄마는 요양 시설의 작은 방, 좁은 침대에 갇혀 살아야 한다. 엄마가 얼마나 삶을 사랑하고 자유를 추구했는지 알기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오빠와 내 사정은 변함없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이번 병원 간병을 계기로 엄마를 케어할 자신이 더 없어졌다. 엄마가 살아나서 감사한 것과 별개로 내 그릇이 간장 종지만 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안쓰럽다가, 화가 났다가, 반성했다가, 폭발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 아픈 엄마를 돌보는 것은 내 한계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모 부양의 의무마저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직접 옆에서 케어하지 않을 뿐, 엄마가 삶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병원 진료, 공과금 납부, 집 유지 보수, 요양원 생활 체크, 외출과 면회 등 계속해서 챙길 일이 많았다.


엄마는 아닐지 몰라도, 내 입장에선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매일같이 죄책감에 괴롭지만, 내 그릇과 한계치를 알고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나중에 뒤탈이 없을 테니까. 죄책감에 압도되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해 행동하면 나중에 원망만 많아지고 내 삶이 엉망이 될 것 같았다.


누군가는 내게 이기적이라고, 부모의 은혜도 저버린 불효 막심한 딸년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너도 나중에 니 자식한테 똑같이 당하라고 해도 할 말 없다. 부모님이 삶을 충실히 산 것처럼 나도 내 삶을 살아야 했다. 하는 데까지는 하지만, 내 어떤 큰 부분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난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으로서는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지만, 사실 엄마만 유독 불행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현재 80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자식의 돌봄을 받다가 집에서 세상을 뜨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우리 엄마가 조금 일찍 시작하긴 했지만, 현재 60~70대에 들어선 베이비 부머들은 앞으로 10~20년 후 엄마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내가 속한 MZ 세대 자식들은 그때 가서 지금 나와 같은 고민을 하겠지.


한국 경제 성장의 주역 베이비 부머가 말년에 병원과 요양병원, 요양원을 뱅글뱅글 돌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현실이 서글프다. 많은 이들이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 것이 무색하게, 여느 시설의 작은 침대에 누워 삶을 마감할 것이다. 하지만 늙고 병드는 것 자체가 어쩌면 초라한 게 아닐까. 비통하지만, 한 존재가 스러져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늙고 병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생각한다. 이에 대비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두면 훨씬 낫지 않을까? 예를 들어 '내가 생활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요양보호사를 하루에 3시간 부른다, 생활하는 데 많은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어디어디에 있는 무슨 요양원에 들어간다, 비용은 통장에 있는 돈 얼마를 써서 몇 년을 생활하고, 다 쓰면 집을 팔아서 충당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노후 생활을 자식에게 기대고 싶지 않다. 이는 경제적, 생활적인 의존을 모두 포함한다. 나는 삶을 충분히 누리고 살았는데, 자식은 나를 건사하면서 자기 삶을 누리지 못하면 불공평하니까. 내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내 자식이 나를 충분히 못 돌봄으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물론 지금은 죽음이 멀리 있다고 느껴서 그렇지, 막상 그때가 되면 흐지부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후와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생각보다 일찍 해야 한다는 걸 늘 염두에 둬야지. 어느날 갑자기 정신을 놓기 전에.



어느덧 엄마의 퇴원 날이 다가왔다. 나는 엄마에게 요양원에 두 달만 더 있으라고 말했다. 두 달 후에는 반드시 데리고 나오겠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엄마가 요양원에서 지내면서 몸을 회복하는 동안, 나는 엄마의 요양등급을 신청하고, 우리 집이나 오빠 집 근처에 집을 얻어 엄마를 이사시킨 후, 방문 요양 서비스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는 생각보다 순순히 요양원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래 류미야, 좀 참아볼게. 거기가... 밥은 정말 맛있어."


매일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엄마가 그곳에서 돌봄을 잘 받고 잘 먹고 잘 자며 기운을 차리길, 그렇게 두 달 후 조금은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길.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