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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 Oct 05. 2023

자기 연민이라는 적

(16)

수요일 밤, 남편과 나의 '나솔데이'였다. 나솔데이는 매주 수요일 <나는 솔로>를 보며 야식을 먹는 우리만의 작은 이벤트였다. 엄마를 생각하면 속이 썩어 들어갔지만, 나는 소소한 일상을 유지하려 애썼다.


TV에 솔로 남녀들의 자기소개가 시작됐을 무렵, 핸드폰이 울렸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오는 전화는 백 프로 나쁜 일이다. 핸드폰을 뒤집어 발신자를 봤다.


'오미실 여사'


엄마였다. 엄마가 핸드폰을 되찾았구나.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떡하지.


"장모님이네? 얼른 받아."


남편이 말했다.


"받아야 하나? 내보내달라고 할 거 같애."


"그러실 수도 있지. 일단 받아."


"나 감당 안될 것 같은데."


"그래도 받는 게 맞아. 얼른 받아."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여보세요? 엄마...?"


"야. 너 당장 와서 나 집에 데려다줘."


"엄마 왜 그래 또. 거기 두 달만 있기로 했잖아."


"나 여기서 잠 못 자. 며칠째 한숨도 못 잤어. 사람이 잠은 자야 할 거 아냐!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돌아올 테니까, 빨리 데려다줘."


"지금 11시가 넘었는데 어떻게 가. 못 가."


"운전해서 오면 되잖아. 빨리 와. 나 기다린다."


"나 밤에 운전 못해.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해. 응?"


"나 지금 미치기 일보직전이야! 빨리 와!"


"나 어두울 땐 무서워서 차 못 몰아. 가다가 사고 나면 어떻게 해?"


"아주 협박을 해라 협박을. 됐고, 당장 와. 너 지금 안 오면 알아서 해."


뚝.


엄마가 소리를 빽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가 핸드폰을 되찾은 이 순간부터 다시 지옥 시작이었다. 추운 겨울,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켜고 미약한 온기를 느끼다 불이 꺼졌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불안할지언정 겨우 찾았던 평온이 사라졌다. 식탁 위에 놓인 후라이드 치킨에선 아직 따끈한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장모님이 지금 오라셔?"


"응. 하아... 죽고 싶다."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전화 끊은 지 3분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 또 왔어. 미치겠네."


"전화받아."


"싫어. 어차피 가지도 못해."


"그래도 받아야지."


"안 받을래. 요양원에서도 받지 말라고 했었고."


"혹시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잖아."


그건 그랬다. 4기 암환자는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솔직히 남편 보기도 민망했다. 내 내밀한 속마음을 모르는 그가 엄마 전화를 피하는 날 인정머리 없는 불효자식으로 볼까 봐 걱정됐다 (난 결혼하고도 여전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없는 용기를 긁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너 출발했어?"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야'라고 부른 적이 없다.


"아니 엄마. 나 못 가.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해."


"야 이 년아! 지금 안 와? 나 미치기 전에 당장 와! 안 오면 나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지금 당장 와!!!!"


엄마는 내게 '년'자를 붙여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다.


"엄마... 제발..."


"너 엄마 엄마 거리지 말고 빨리 와. 마지막 경고야."


뚝.


이 순간, 내가 사라져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뛰어내리고 싶은 건 나였다. 죄의식, 극도의 불안, 괴로움, 육체적 피로, 원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엄마를 요양원에 두자니 죄책감으로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고, 집으로 홀로 돌려보내자니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았고, 오빠가 엄마 곁에서 돌보는 일은 죽었다 깨나도 없을 것 같았고, 육아로 지친 나는 밤마다 공격적으로 변하는 엄마를 케어할 자신이 없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


순간, 내가 가까스로 꾹꾹 눌러놓았던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남편, 나 진짜 새언니한테 서운해."


엄마는 뇌수술하고 퇴원 후 2주 정도 오빠네서 지내며 몸을 추스르고 싶어 했다. 오빠네 집이 G대학병원과 가까운 것도 있지만, 의사도, 뇌종양 카페에서 찾아본 게시글에서도 섬망 증상이 있으면 퇴원 후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공간에서 있어야 정신이 금방 돌아온다고 말했다.


평소 엄마랑 새언니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다. 독립적인 성격의 엄마는 오빠 부부에게 무엇을 하라는 부담을 일절 주지 않았다. 명절이나 생일 외에는 가족행사가 없었고, 그마저도 만나서 점심 먹고 간혹 차를 마시는 게 다였다. 새언니도 요즘 며느리 같지 않게(=나와 다르게) 엄마를 잘 챙기는 편이고, 귀찮은 일을 흔쾌히 해주곤 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였다. (언니의 생각은 정확히 모른다)


"엄마가 새언니한테 전화해서 그 집에서 2주일만 있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안 된다고 그랬대. 집에 있을 공간이 없다고. 남편도 가봐서 알겠지만 그 집이 한 30평은 되잖아. 우리 집이 12평이야. 아무리 공간이 없어도 우리 집보다 없겠어? 사실 공간이 문제가 아니지. 새언니는 엄마를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나는 언니에게 딱 2주만 모셔주면 그때 엄마를 모시고 나오겠다고 말했다. 요양병원이든 아니면 남편을 시댁에 보내고 우리 집에라도 모시든. 하지만 언니가 어물어물하며 핑계를 댔는데, 결국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머리가 띵할 만큼 서운했다. 우리 엄마가 자기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리고 내가 자기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나 있잖아, 오빠랑 새언니가 엄마 아픈 거 알면서 하와이 갈 때 나 믿고 마음 편히 놀다 오라고 문자 보냈다? 그리고 나 응급실에서 엄마 간병하다가 감기 걸려서 우리 아기한테 옮기는 바람에 아기가 중이염으로 두 달을 고생했잖아. 나 그때도 원망 안 했어. 근데 어떻게 단 2주를 못 모신대?"


서운함에 눈물이 맺혔다.


"너무하지 않아? 내가 말야, 엄마나 아빠가 그들한테 쪼금이라도 귀찮은 일 시킬 거 같으면 내가 다 했거든? 심지어 오빠 결혼하기 전에 아빠가 급전 필요하다고 반반씩 부담해서 빌려달라고 했을 때, 내가 혼자 뒤집어쓰고 대출해서 드렸어. 둘이 마음 편히 결혼하라고. 나 4년 동안 그 돈 원금이랑 이자 나눠서 다 갚았잖아. 이자만 5백만 원이었어."


말하다 보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가족을 위해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희생해야 하는 슬픈 운명의 주인공.


"아니, 그리고 상식적으로 뇌 수술받은 사람이 어떻게 혼자 지내.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모르겠다 이거 아냐. 솔직히 길게도 아닌데, 남이라도 2주는 돌봐주겠다!!!"


나는 씩씩댔다. 결국 나는 이 모든 책임을 오빠 부부, 정확히는 새언니에게 돌리고 있었다. 오빠는 그 집에서 발언권이 없었다. 언니가 하자면 하고, 하지 말자면 하지 않는 그였으니까. 나는 상황이 심각해질수록 '만약에'를 무한 루프 돌렸고, 많은 경우 '새언니가 엄마를 그 집에서 2주만 모셨다면, 엄마가 안정을 찾아 지금처럼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치매 노인처럼 굴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새언니가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새언니에게 시어머니일 뿐이었다. 가족이 아닌, 남편의 엄마. 그녀는 자기 엄마가 아팠다면 과연 하와이로 떠났을까? 자기 엄마가 뇌종양 수술을 했다면 집에 공간이 없다는 핑계로 못 오게 했을까? 자기 엄마가 수술 직후에 혼자 집에 있다면 맘 편히 잠들 수 있었을까?


남편은 내 얘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래, 네게도 이건 남의 집 얘기지. 나는 <나는 솔로>와 치킨을 뒤로하고 이어폰을 챙겨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켰다. 이렇게 마음이 엉망일 땐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어야 한다. <즉문즉설>은 우울해서 죽고 싶은 마음을 생기 있고 평온하게 만들어준다. 문제는 그걸 끄는 순간 다시 진흙탕 같은 현실로 돌아온다는 것. (나는 죽기 전까지 해탈은 못하지 싶다) 진정 마약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유난히 힘든 날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듣기 시작해 밤에 눈 감을 때까지 듣는다. 그럼 그날은 그럭저럭 버텨진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즉문즉설의 다양한 사연들로 나를 안내했다. 자신감이 없어 고민인 청년, 25년 동안 시어머니를 한 방에서 모시고 산 며느리, 방에서 안 나오는 중학생 아들을 둔 엄마, 장애아를 키우는 아빠, 남편이 밖에서 애를 낳아 와 속상한 아내... 세상엔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모두가 갖가지 문제로 고통받고 있었다. 사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될 만큼.


힘든 일을 겪는 사람들은 본인의 운명을 딱하게 여긴다. 그리고 자신의 불행한 상황에 대해 부모를, 형제를, 배우자를, 친구를, 직장동료를 원망한다. 하지만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남에 대한 원망과 자기 연민이다. 남을 원망해 무엇이 바뀌겠는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며 주저앉아 있으면 누가 나를 일으켜세우겠는가?


마음이 가라앉으니 내 상태가 명확히 보였다. 내 세상에서나 내가 제일 불쌍하지, 객관적으로 인생의 굴곡을 비교하면 어디 명함도 못 내민다. 슬픈 운명의 주인공은 무슨.


냉정히 말해, 이 모든 상황은 엄마가 암에 걸려서이지 언니가 뭘 잘못해서 생긴 건 아니다. 그들이 엄마를 모셨어도 똑같이 치매 증상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더 나쁘게는 오빠와 새언니와 엄마가 한 집에서 뒤엉켜서 지내다 심한 사달이 났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어린 조카가 스트레스 받았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새언니도 나한테 서운한 게 있지 않으려나? 재작년 언니가 자궁근종 수술받았을 때 내가 언니한테 안부 전화 한 통이라도 했나? 언니는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반찬을 바리바리 싸왔는데 난 언니한테 선물을 제대로 한 적이 있나? 하다못해 언니가 가져온 반찬통이라도 제때 돌려줬나? 우리 아기 옷도 많이 사줬는데 나는 조카에게 뭘 해줬지? 그리고 엄마랑 아빠가 이혼해서 우리 남매가 난감해할 때 언니가 중간에서 든든하게 역할을 해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새언니는 얼마 전 정리해고를 당해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고, 조카는 심하진 않아도 어떤 난치병을 앓고 있었다. 언니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데, 이상행동을 하는 엄마를 잠시라도 모시기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지 새언니의 엄마가 아니다. 까놓고 말해 엄마는 그녀에게 그냥 ‘아줌마’다. 엄마가 우리를 낳고 키워준 은혜는 우리가 갚아야지, 굳이 여력이 안 되는 새언니에게 희생을 강요해선 안 된다. 내가 그 상황이라면 흔쾌히 우리 시어머니를 모셨을까? 지금이야 '딱 2주인데 남이라도 돌봐주겠다'라고 생각하지만, 그 상황이 오면 사실 모른다. 어떤 분이 그랬다. 어떤 상황에서 "나는 그렇게 안 할 거다"라고 함부로 단언하지 말라고. 그저 운이 좋아서 아직 그 상황에 놓이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자기 연민과 뒤틀린 죄책감은 나를 좀먹고 있었다. 내 안의 못난 면은 새언니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어 했다.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 새언니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잠들기 직전, 법륜스님이 로맨스 스캠으로 전재산을 날린 사람에게 조언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


"10년 지나 놓고 돌아보면 다 한여름 밤의 꿈이에요."


내게도 이 시기가 꿈 같이 느껴지는 때가 오겠지? 지금 괴로워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도 나중에 편하게 ‘그땐 그랬지’ 하는 날이 오겠지? 너무 아등바등하지 말자. 어찌할 수 없다면, 폭풍우에 요동치는 바다를 멀리서 바라보듯 고요히 있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누구 탓도 아니다. 나 또한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걸 인정하고, 무력함에 절망하지 말자.


-

다음날 아침, 핸드폰에 엄마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30통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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