뽈뽈대며 수집한 재밌는 간판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나에겐 아주 오래된 습관이 있다. 아마 한글을 깨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 거의 평생을 함께해 온 습관. 바로, 길거리 간판 읽기.
길을 걸을 때나 차를 타고 이동할 때, 거의 항상 길거리 간판을 읽는다. 의식해서 읽는 건 아니고 그냥 창밖에 시선을 두면 온통 글자라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차멀미가 심한 탓에 차 안에서는 단 5분도 핸드폰을 볼 수 없어 무료함을 달래고자 체득한 습관 같기도 한데,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이게 독특한 습관인 줄 몰랐다.
“너는 꼭 차타고 가면 간판을 읽더라? 무슨 한글 공부하는 어린 애 같아.”
토마토를 유달리 싫어하는 선배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토마토 부동산’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와, “저기 봐요, 토마토다!”하고 키득키득 댔더니 선배가 웃으며 얘기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남들은 차를 타고 가면서 간판을 눈여겨 보지 않는다는 걸… (누구나 읽는 거 아니었어?! 조금 충격 받았다.)
모든 간판을 다 기억해두는 건 아니고 유독 인상 깊은 간판들이 몇 개 있는데, 카테고리를 나눠보자면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가장 애정하는 종류의 간판인데, 이런 간판을 마주치면 비실비실 웃음이 나와 그날 하루치 행복을 채웠다는 느낌이 든다. 대표적인 예시이자, 가장 좋아하는 간판은 아래 사진 속 간판. '오늘 바람이 전해주는 소리. 당신은 멋져! 아무튼 누군지 몰라도...'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인터넷에 짤처럼 돌아다니는 사진인데,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진다. 사장님의 넓은 마음과 깊은 정감도 느껴진다. 얼마나 인품이 좋은 사장님이길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냅다 “당신은 멋져!”라고 칭찬을 보내는 걸까.
실제로 본 간판 중에서는 '맵시있게'라는 간판을 가장 좋아한다. (“맵시챙겨!” 라고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동해시로 여행갔다가 시장에서 발견한 의류점 간판이다.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어 구경은 못 해봤지만, 간판만 봤을 뿐인데 얼굴도 모르는 사장님의 이미지가 설풋 그려진다. 색색깔의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꾸민, 말 그대로 맵시를 잘 챙길 것 같은 4050 여성의 이미지. (아니라면 죄송하다.) ‘간지’라는 일본어를 주로 사용하는 요즘, ‘맵시’라는 단어가 주는 경쾌함이 좋아서 사진을 찍어 두었다.
또, 주로 주변 지인들의 이름이 그대로 들어간 간판을 보면 꼭 사진을 찍어 그 친구에게 전송한다. 실없는 웃음이지만 어찌됐든 웃음이 나오기 때문에 그 웃음을 동명이인 친구에게 옮기는 셈이다. 하도 많이 보내서 요즘은 자중하고 있다.
얼핏 보면 앞서 말한 1번 분류와 흡사해 보이지만 엄밀히 다른 분류다. 이 분류에서는 ‘재치’가 빠졌다.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하게 촌스러운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빵 터지는 간판이 있다. 예를 들면, 친구가 사는 옆동네에 ‘그래도, 국수’라는 식당이 있다. 괜히 감성 돋는 쉼표가 시선을 잡아끈다. Yes24의 ‘아무튼, OO’ 도서 시리즈와 프랜차이즈 와인 바 ‘오늘, 와인 한잔’이 떠오르긴 한데... 묘하게 요즘 감성을 따라가려는 듯하지만 메뉴가 국수여서 그런지 결과적으로 언발란스인 점에서 웃음이 터진다.(이 집 사장님께도 죄송하다.) 뭐, 국수도 감성 있게 후루룩 할 수 있으니까.
이런 간판도 극강의 장점이 있으니, 한번 웃고 나면 절대 이름을 까먹지 않는다. 그럴싸하게 외국어를 섞은 멋들어진 식당 이름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머리에서 휘발된다. 몇몇 카페는 심지어 직접 방문했음에도 나중에 다시 찾으려고 하면 도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빵 터진 간판들은 조금 촌스러울지 언정 절대 이름을 까먹지 않는다. 가끔 동네 친구가 물으면 주저 없이 바로 대답해준다.
“화곡역 앞에 식당 이름 뭐더라? 우리가 엄청 웃은 간판 있잖아.”
“그래도, (꼭 조금 텀을 주고 아련하게) 국수.”
“응, 맞아. 그 집 ㅋㅋㅋ.”
반응이야 어찌됐든, 살아남기 힘든 서울바닥 자영업 경쟁에서 소비자의 뇌리에 이정도로 이름을 깊게 각인 시켰다면 성공한 간판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살면서 가장 크게 웃은 간판은 중랑구 소재 노래방(?)으로 추정되는 '가요계의 새로운 바람, 신태풍!'이다.
이건 회사를 다니면서 새로 수집하게 된 카테고리인데, 직업이 에케터이자 마디터라 짧고 굵은 간판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사실 간판은 한방이 있는 가장 짧은 카피라이팅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 문을 열고 들어오도록 만드는 가장 최전방의, 가장 절실한 홍보 문구다.
디지털 에디터이다 보니 콘텐츠 과다 상태인 인터넷 세상에서 살아남는 카피를 써야 하는 게 일인데, 매우 어렵다. 좀만 별로면 바로 ‘뒤로가기’ 버튼 혹은 ‘스킵skip’ 버튼을 누르는 소비자를 상대로 그들의 엄지를 잠시 멈추게 만드는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간판을 보면 사장님들의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29CM의 카피라이터 이유미 작가가 쓴 책 ‘잊지 않고 남겨두길 잘했어(2019)’에도 간판을 보다 보면 영감이 떠오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름만 들어도 분위기가 느껴지는 간판을 보면 감탄이 나오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서 브랜딩이 됐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가령, 종로에 있는 펍 ‘서울집시’는 이름만 들어도 해먹에 늘어져 맥주나 마시고 싶은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실제로 가보면 종묘 담벼락 바로 맞은편이라 전체적으로 한국 전통미가 물씬 느껴지는 풍경인데, 공간에 있는 모두가 근심걱정은 잠시 담벼락 너머로 툭 던져둔 사람들처럼 웃으며 온갖 종류의 맥주를 만끽한다. 이름 그대로 서울집시들이 아닐 수 없다. 태안에 있는 숙소 ‘무이림(無以林)’이나 동해에 있는 숙소 ‘사유의 숲’도 비슷한 느낌으로 좋아한다. 비움으로써 완성하는 숲과 사유를 하기 위한 공간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숙소의 분위기와 컨셉이 느껴진다.
다른 결이지만, 강렬한 네이밍으로 나의 발목을 잡아 채 결국 소비까지 이끌어낸 간판도 있다. 서촌에 있는 유명한 카페를 가기 위해 걸어가던 중 ‘커피가 맛있는 장인 커피’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보통 커피에 붙는 명칭은 ‘바리스타’나 ‘마스터’가 보편적인데, ‘장인’이라니? 만약 ‘커피 바리스타의 집’이었다면 그대로 지나쳐 원래 목적지였던 다른 카페로 갔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커피를 내리기에 장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걸까. 장인은 한분야에 몰두해 자기만의 기술을 터득한 사람들 아닌가? 그럼 이 카페 사장님만의 기술은 뭘까? 묘하게 빠져들고 궁금해진다. 입구 앞에 놓인 입간판에 ‘취향 따라 다채로운 맛’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서 더 혹했다. 결국 행선지를 바꿔 장인의 집에 들어가봤고, 커피는 만족스러웠다.
간판 홀릭은 여행가서도 멈추지 않는데, 광주에 갔을 땐 순전히 간판에 이끌려 ‘떡볶이 대통령’이라는 분식집에 갔다. 떡볶이가 맛있으면 맛있는 거지, 얼마나 맛있길래 떡볶이 대통령이라는 국내 최고의 지위를 본인 가게에 하사한 걸까? 대통령이 방문한 집이라면 ‘대통령 떡볶이’였을 텐데 ‘떡볶이 대통령’이라니. 본인의 가게가 떡볶이계의 대통령이라는 그 자부심! “이 정도 자부심이라면 한 번 먹어볼 법도 하다!”라는 생각에 방문했고, 역시나 맛에 만족했다.
시답잖은 간판 얘기를 끝까지 읽은 당신! 못해도 이틀 정도는 거리를 오갈 때 간판이 신경 쓰일 것이다.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