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갚은 까치는 될 수 없어도
스스로에게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수학’이라는 과목을 누구의 도움 없이 해결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정답으로 가는 수많은 길들을 안내해 준 고마운 선생님들이 있었다. ‘성적 수직 상승’, ‘기적을 만들어 드립니다’와 같은 수식어를 그들에게 선사할 수 없었던 학생이지만, 잊고 싶지 않아 적어보는 수학쌤들 이야기.
나의 동생과 동갑이었으니까 일곱 살이나 어린 수학 선생님이었다. 처음에 다녔던 학원은 ‘독학 재수학원’으로 단과반이 개설되지 않았다. 대신 의과대학이나 사범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들이 학원생들이 남긴 질문에 문제를 풀어주는 방식이었다.
학원 입장에서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붙여준 듯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병아리 선생님(만약 그를 본다면, 왜 병아리인지 바로 알게 될 것이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시간을 내서 수학 개념을 가르쳐 줄 정도로 진심을 다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엉뚱한 포인트에서 멈칫거리고, ‘이런 걸 질문하나?’싶은 수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늘 머리를 긁적거리며 ‘아....’ 혹은 ‘그게 아니라...’를 연발했었다. 그럼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했으니, 그는 분명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수의 학생들을 명성이 있는 학교에 입학시킨 수학강사.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저녁을 굶어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인데 뭐가 힘들어?’라고 생각하겠지만, 10대이면 몰라도 20대 후반의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일정이었다. 그래서 젤리와 초콜릿, 소리가 크게 나지 않는 크래커를 주섬주섬 꺼내 먹으며 수업을 들었다. 문제 푸는 시간에 선생님은 돌아다니며 풀이 과정을 체크하곤 했는데, 책상 위에 올려놓은 과자봉지들이 안쓰러웠는지 가끔 음료라던가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니어서 수업 시간에 많은 아이들이 머리를 빙빙 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영양제 챙겨 무라!’ 또는 ‘정신이 다 놓고 있나?’라는 말로 호통을 쳤다.
그 당시에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정말 많은 문제들을 풀었는데, 선반 두 칸 정도의 책과 시험지로 빼곡 찼다. 돌이켜보니 우리가 저녁을 먹지 못했다면 그도 먹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가 백 문제의 문제를 풀었다면 그는 천 문제의 문제를 풀었겠지.
유일한 여성이고, 유일하게 안경을 쓰지 않은 수학 선생님. 깔끔한 판서와 정확한 도형 그리기, 길어지는 수식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과 명확한 이유가 있는 그래프들. 목소리가 크거나 찢어지지도 않고 매우 우아하셨다. 얘들아, 펜 들어. 이차함수 그린다~ 또는 이 그래프에 변곡점이 몇 개야~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 들리는 것 같다. 반전으로 뉴진스의 OMG를 따라 추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가끔 과외를 하러 다녔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나 신혼 시절의 어려웠던 순간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주셨다. 현재를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 그러니까 지금 네 앞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풀어내야만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거겠지. 그런데 아이들보다 조금 더 나이가 먹은 나는 같은 여성으로서 그녀가 강해져야만 했던 이유를 들은 것만 같아 마음이 찡했다.
지금까지의 선생님들 중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동년배의 수학 선생님. 그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라데이션 환호’이다. 사설 모의고사 시험지로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신유형의 문제들이 나오면 어떻게 문제를 읽어 나가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그러다 막막한 부분이 생기면 여러 방법으로 풀어나가는 것을 보여주다가 ‘으아아! 이거잖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데 그 모습이 옅은 색부터 진한 색으로 차오르는 기계 같았다. 이 선생님이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그가 차고 있던 애플워치에서 ‘소음에 노출되었다’라는 경고문자가 뜰 정도였다.
이 수학선생님은 야구의 광팬이었다. 가끔 전광판에 등장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응원한다고 하니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겠지? 그의 유쾌한 성격처럼 수학 문제도 조금은 호쾌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