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징키 Jul 12. 2024

3교시, 인공지능과 칸트가 등장하는 영어 지문

 친구를 따라 간 달란트 마켓은 충격이었다. 책상 위에 각종 문구류가 나열되어 있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컵 떡볶이를 팔고 있는 것은 둘째 치고, 외국인과 마주 보고 서서 이야기를 하는 친구의 모습이라니! 초록 얼굴의 ‘지토’와 파란 머리의 ‘민수’가 불러주는 챈트만 알고 있던 나는 벽에 붙어있는 영어 단어들과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는 영어 문제집들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중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리고 몇 해가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눈물을 글썽이기보다는 교과서와 EBS 지문을 통째로 외우는 것을 선택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을 평범한 방식으로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영어는 늘 마음의 가장 밑바닥을 톡톡 건드렸다. 생경한 것을 접할 때의 호기심과 즐거움보다, 그 새로운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이 늘 앞서 나갔다. 이제라도 처음으로 돌아가야지. 손을 반짝반짝 흔들고 ‘이것이 트윙클이구나!’하며 하나의 별이 되던 그때로.  



- 성실의 승리

 영어가 절대 평가가 된 이후, 학생들이 전보다 영어 공부의 비중을 줄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영어 지문이 더 쉬워졌는가? 그렇지도 않다. 헤겔과 스피노자가 등장하고, 시대 흐름에 발맞춰 인공지능 기술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시험이란 더 어려워지는 길만 남는 듯하다. 학생들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그들을 평가하기 위해 더욱 정교하고 복잡한 지문을 출제해야 하니 그런 걸까.

 영어 등급이 다른 과목에 비해 더 우수했던 이유는 영어 시험의 특성과 나의 성격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실’이다. 예전에 어떤 인사 담당자가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국민 중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성실성을 어필하는 일은 그만두어라.’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옆에 있는 친구도, 앞에 앉은 친구도 모두 영어의 공부량을 줄여갈 때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영어 과목에 투자할 수 있는 성실성이 당신에게는 있는가? 모두가 휩쓸려갈 때에도 마음을 잡고 묵묵히 해나간다. 그건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어도 아무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시작은 단어

 처음부터 영어 성적이 잘 나온 건 아니었다. 역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영어라도 잘했다면 모든 순간이 다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서 부지런히 단어를 외웠다. 취업 준비생일 때 준비하던 토익과 수능의 영어는 달랐는데, 아무래도 목적성이 판이하니 자주 출제되는 단어가 달랐다. 

 하루에 단어를 외우는 시간은 세 번이었다. 학원을 갈 때, 점심시간, 집으로 돌아갈 때. 보통의 단어 책들은 day별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하루 분량의 단어를 반복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전날 보았던 단어를 테스트하고 새로운 단어를 다시 입력. 그걸 누적해서 토요일에는 5일간의 단어들에 대해 종합적으로 시험을 보았다. 누가 만들어준 시험지도 없었고, 누가 시켜서 하는 시험도 아니었다. 그 당시에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는 꾸준함밖에 없었다.



- 주제를 알기

 영어 시험의 출제 유형은 다음과 같다. ‘주제/요지 파악’, ‘빈칸 추론’, ‘어법/어휘’, ‘글의 순서’, ‘문장 삽입’, ‘장문’ 등. 영어 과목을 가르치는 유명 강사들과 좋은 EBS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기에 유형에 대한 접근법이나 스킬이라면 스킬일 것들을 잘 알려주시겠지만, 스스로 영어 공부를 할 때 계속 생각했던 것은 ‘그래서,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였다.

 영어 지문은 국어 지문과 달리 짧고, 비문학의 글들이 실린다. 영어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쓰지 않는 이상 그 지문에는 반드시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되어있다. 칸트가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했던, 인공지능 기술 이야기를 하건 간에 주제를 파악하면 그에 따라 뒤의 문장을 연결해서 읽거나 또는 앞과 뒤의 문장들을 연결해서 읽는 연습을 했다. 만약 문제를 틀리면 어떤 부분에서 주제를 잘못 파악했는지 혹은 주제를 파악했어도 선지들 중 어느 것에서 혼란을 겪었는지를 빼곡하게 적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똑같은 부분에서 계속 틀리게 된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도 모든 문제집을 모아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틀린 걸 또 틀리는 스스로를 발견할 것이다. 그건 사고의 흐름이 잘못되었음에도 인지를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역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 법칙을 벗어나는 가장 쉬운 길. 그럴 때는 내 주제도 알아야 한다. 오만은 금물.




작가의 이전글 수학 끝, 쉬는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