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하는 어휘들
가끔 나에게만 크게 와닿는 한국어가 있듯 영어 단어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거나, 정말 미치도록 외워지지 않거나, 특수한 상황에서 의미를 알게 되는 여러 이유들로 말이다.
수능을 준비한다고 모든 SNS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한 친구가 매달 메일을 보내주었다. 자신의 일상과 우리가 함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았다며 미안해했지만, 그 마음이 고맙고 애틋했다. 세어보니 거의 70통 가까이 된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 기꺼이.
cherish라는 단어를 가만히 읊조리다 친구 생각이 났다. 본명 대신 ‘체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친구를 위한 것만 같았다. 체리 같은 사람.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소중하게 대할 줄 아는 사람.
*체리와 나눈 메일들을 엮으면 좋은 기록이 될 것이지만, 우리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들과 (특히 나) 적나라한 의견들이 담겨 있어 개인 소장만 해야겠다. 혹시 모르지. 먼 미래에 우리가 주고받은 이 메일들이 역사를 연구하는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될지도!
전혀 다르게 생겼고, 같은 것이라고는 s로 시작한다는 것. 그런데 나는 두 단어가 지문 어딘가에 등장하기만 하면 희생은 결핍이 되고 부족한 것은 희생이 되었다. 헷갈린다는 사실을 인지해서 그랬는지 머릿속이 더 뒤죽박죽이었다. 신기하게도 시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의 뇌에서 각 단어가 제대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이런! 긴장감과 암기의 상관관계를 연구할 누군가 없나요?
2023년도 3월 빈칸추론 마지막 문제. An adaptation is not vampiric. 적응이 흡혈귀가 아니다? 조정은 흡혈귀가 아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문장이 한 번 삐끗하자 이어지는 문장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눈으로는 영어 철자만 읽고 또 읽고. 진창에 빠져버렸다. adaptation에 각색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원작(source)과 독자(reader)가 왜 등장하는지 납득했을 텐데. 해설지를 보고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어휘 하나가 갖는 엄청난 힘을 느꼈다.
또 아파? 이번엔 어디야? 나는 꼭 중요한 순간에 아픈 학생이었다. 어떤 날은 배가 아팠고, 어떤 날은 체하고, 어떤 날은 두통이 심했다. 그러니 친구들은 평소에는 잘 놀다가도 시험만 되면 끙끙 앓고 있는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타고나게 똑똑하고 놀라울 정도로 넉살 좋은 것도 물론 부럽지만, 가장 갖고 싶은 능력은 성실하게 노력한 것을 결과로 끌고 올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