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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여름 Dec 13. 2021

공부는 살아있다!

비가 촉촉히 내리고 어둠이 이미 세상을 덮은 저녁 시간.

아이들과 함께 악기 레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이안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레야, 너 분수 배웠어?"


"어."


"그럼 너 이거 알아?..."


그렇게 시작된 분수에 대한 대화는 집으로 오는 30분 내내 주제가 바뀌지 않았다. 단위분수, 대분수, 가분수, 급기야 아직 이레가 배우지도 않은 통분과 약분, 최소공배수, 최대공약수...

이안이는 마치 이레가 분수를 배우는 이날 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아는 분수에 관한 모든 지식을 제법 체계적으로 쏟아냈다. 이레도 형의 이야기에 꽤 귀를 기울이다가 한 번씩 답도 하고 질문도 한다. 나는 이 대화가 깨질까 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운전만 했다.


이안이 6학년, 이레 3학년.


같이 차를 타면 싸우는 게 다반사이던 아이들이지만 가끔 학교에서 배운 내용으로 이렇게 진지한 대화도 한다. 이럴 때 나는 나의 육아법이 틀리진 않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다. 분수로 30분 대화가 가능한 초등생을 본 적이 없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긴 했지만 잘했어. 잘하고 있어. 세상 뿌듯함이란 이런 것이다.




이레와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아파트 뒤편 공터였던 곳에 무슨 공사를 시작하는지 땅을 깊게 파놓고 주변에 안전펜스를 둘러쳐 놓았다. 


"엄마, 여기 화석이 나왔나 봐요. 화석 발굴하느라 파 놓은 것 아닐까요?"


아이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매우 유심히 살피며 한동안 화석 발굴 이야기를 했다. 




출근하는 길, 나는 5년째, 이레는 4년째 같은 길을 지나 학교를 간다. 늘 똑같은 길인데 요즘따라 이레가 바깥 풍경을 자주, 유심히 살펴본다.


"엄마, 저것도 지층이죠?"


그러고 보니 산을 깎아 길을 내었는지 군데군데 속살을 드러낸 낮은 산들이 많다.


"어, 저기도 지층이 있다. 어, 저기도!"


나는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 이 녀석이 지금 지층과 화석을 배우고 있구나. 그래서 안 보이던 지층이 보이기 시작하고 공사장마저 화석 발굴장으로 보이는구나.


똑같은 세상이란 없다. 곤충학자의 눈에는 곤충만 보이고 식물학자의 눈에는 식물만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이고 관심 있는 만큼 자세히 보인다. 그리고 배운 만큼 우리는 몰랐던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책 속의 지식이 생명을 달고 책 밖으로 튀어나온다.

 늘 똑같던 내 생활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고 단순하던 내 생각을 다양하고 정밀하게 변화시킨다. 책에서 세상을 배우고 세상에서 책을 넘긴다. 초등에서의 배움은 앎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고 아이들에게 그렇게 배우도록 해주고 싶었다. 책과 문제집 속에 있는 지식을 꺼내 와 오감으로 느끼고 온 몸으로 익히게 해주고 싶었다. 


공부는 대학입시의 수단이 아니라 내가 이 사회와 자연 속에서 당당한 독립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과정이다. 


처음 나는 그 마중물 역할만 했다. 아이가 무엇을 배우는지, 무엇을 배우게 될지 미리 알고(나의 직업적인 유리함도 있었다) 그 내용을 계속 생활과 연계시켜 주었다. '너는 딴 세상을 배우는 게 아니야, 지금 너를 감싸는 그 모든 것을 배워가고 있는 거야. 공부는 책과 삶을 연결하는 거야.'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는  애쓰지 않아도 아이들은 공부와 삶을 연결시킬 줄 알게 되었다. 소수를 배우면 소수를 넣어 대화를 하고 식물을 배우면 식물만 보인다. 사회에서 교통수단의 발달을 배우면 교통수단 이야기나 교통수단 이름 대기 게임을 하고 블록으로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이안이는 사칙연산이 어지럽게 섞인 여러 가지 혼합산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 나는 학부모와 상담할 때 항상 강조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세요. 그러면 나중에는 관심 갖지 않아도 알게 될 것입니다. 아이가 먼저 이야기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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