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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여름 Dec 13. 2021

다시 너의 뒤에서

나는 자녀에 대한 교육관이 뚜렷하다고 생각했다. 자신감도 있었고 어느 정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공부를 시키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안이가 중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방학부터 나는 조금씩 불안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과정은 내가 훤히 꿰고 있지만 중학교는 정말 깜깜이다. 30년도 더 된 나의 중학교 시절 경험이 내 사전 지식의 전부이다. 더구나 6명이 전부이던 학급에서 한 반에 30명씩 1학년만 11개 반이 있는 큰 학교로 진학을 시키려니 망망대해에 애 혼자 조각배 태워 내보내는 느낌이다. 


'이곳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학원에서 잔뼈가 굵었을 텐데 실력 차이가 너무 나면 어떡하지?'


생각해보면 나에게도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 탑을 찍지는 않더라도 보통보다 뒤처진다면 앎과 삶이 하나 된 교육이고 뭐고 다 공허한 외침이 되는 것이다. 성적이 하위권에 머무는 아이의 부모 말을 누가 귀담아듣겠는가?


처음으로 예습을 시켰다. (선행이라고 보기에는 미미한 수준이라 예습으로 보기로 했다.) 선행이든 예습이든 하기로 한 까닭은 초등과 달리 중등은 아이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기본과정 없이 바로 심화로 수업을 진행할 것 같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걱정에 걱정을 더해 초조함이 겹쳐진 나는 이안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이의 뒤에 서야 한다던 나는 다시 아이의 앞에 서서 아이를 억지로 끌고 가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더 말을 안 들었고 나는 더 억세졌다. 


가장 걱정이었던 것은 공부의 양이었다. 예비중학 영어와 수학 문제집을 입학하기 전에 전체적으로 훑어볼 수 있으면 딱 좋으련만 아이의 공부시간은 짧디 짧았고 진도도 팍팍 나가주지 않았다. 이안이는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이해가 될 때까지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면이 있었고 나는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지금 신경 쓸 수 없다고 채근했다. 또다시 몇 번의 신경전이 있었다. 방학은 끝나가는데 겨우 2단원 다 나갈까 말까... 영어도 해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쌓아둔 것은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지기 마련이다. 결국 입학을 하고도 휴대폰 게임에 빠져 있던 이안이는 날벼락을 맞았다.(그 옛날 문제집을 던지던 엄마가 다시 나타났다!) 아이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일관성 없는 엄마다. 6학년 시작할 때는 마지막으로 놀 수 있는 해니까 마음껏 놀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라던 엄마가 해 바뀌니까 공부 안 한다고 날마다 안절부절 공격형이다. 이왕 터진 것 후회 없이 쏟아부은 다음 날 나는 나의 만행을 동료 교사에게 자백하며 나도 어쩔 수 없는 욕망 엄마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역시나 이안이는 TV로 유튜브를 보고 있다. 그러면서 공부 중이라고 한다. 공부 중이라고? TV 앞에 앉은 이안이 앞에는 입학 준비물로 사준 대학노트와 연필뿐이다. 순간 이 아이가 유튜브에 나오는 뭔가를 정리하고 있는 줄 알았다. 게임 캐릭터라든지 아이템들을 받아 적는 건가? 그도 그럴 것이 공부한다는 놈이 유튜브를 보면서 계속 무언가를 적고 있으니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교과서나 문제집도 하나 없이 진짜 공책과 연필뿐이다. 그래도 자기는 공부하고 있는 중이란다. 아, 네네 그러세요?


밤 9시가 넘어서 이안이가 다했다며 공책을 내밀었다. 그 공책을 보던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 소인수분해를 배우기 시작한 이안이는 5학년 때 배우는 약수와 배수를 시작으로 최대공약수, 최소공배수, 소수, 합성수 등을 거쳐 소인수분해까지 모든 과정을 순서대로 정말 깔끔하게 정리했다. 책 한 권 없이 공책과 연필만 들고 (유튜브 봐 가면서) 자신이 지금껏 공부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다. 어제 엄마 말에 충격받아서 오늘 이렇게 공부를 했단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됐다!'


더 이상 다른 요구가 필요 없었다. 아이는 속도는 느리지만 진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뚝뚝 끊긴 학문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연결된 그 학습 고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기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수동적으로 쑤셔 박는 공부가 아니라 생각이 있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수학경시 1등 하는 것보다 나는 이 노트가 더 자랑스러웠다. 만점으로 탑을 찍는 것보다 선생님이 내준 학습지에 풀이과정을 빼곡히 적어내는 그 시험지가 나는 더 자랑스럽다. 이 아이의 이런 능력을 문제집 속에 가둘 수는 없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나는 또다시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공부 좀 하라는 엄마 말에 충격 받고 공책과 연필 하나로 정리한 공책
이안이의 수학 학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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