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이(중3)
7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밖에서 보온병에 얼음물 담는 소리가 난다. 오늘 수행평가 준비한다고 일찍 간다더니 얀이가 벌써 다 챙겼나 보다. 좀 있으면 밥 달라고 나를 깨우러 오겠지, 빨리 가야 한다며 태워 달라 하겠지... 그러면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남편이 들어오며 얀이 벌써 갔다고 알려 줬다.
"밥은?"
"알아서 챙겨 먹던데?"
"미*놈"
헛웃음이 난다. 우리 집에서 미*놈은 이제 욕이 아니라 칭찬으로 자리 잡을 모양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우리 시의 홍보물을 만드는 게 수행평가라고 했다. 어젯밤에 미리 해보더니 수업시간만으로 충분히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등교를 한 것이다. 눈앞에 두고도 양말도 못 찾고, 옷은 거꾸로 입고, 심심하면 손에 든 것 떨어뜨리고, 자기 물건도 잘 못 챙기는 애가 가끔씩 미친 짓을 한다. 나는 문득 이 아이의 미친 행적들을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6 때 원주율에 꽂혀서 60자리까지인가? 외움. 담임이 어이없어함.
초3 때 1년이 몇 초인지 계산함. 단순히 곱셈을 한 것이 아니라 숫자를 분해해서 희한하게 계산했는데 그게 맞아 버렸음.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던지 심심하면 아무나 붙잡고 '너 1년이 몇 초인지 알아?' 묻곤 함. 지금도 외우고 있으려나.
5학년 때부터 2년 반동안 물병 던져 세우기에 꽂혀서 물병 위에 물병을 던져서 세우는 경지에 이름. 그것도 뚜껑 부분이 맞닿게. 중1 때 물병 세우기로 동영상을 제작한 후 퀘스트를 완수한 듯 그 이후에는 거의 안 함.
5학년때 갑자기 나눗셈하는 법을 잊어버림. 담임선생님의 보충 지도로 회복은 되었지만 그 충격으로 무한히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나눗셈을 A4 한 바닥 찰 때까지 계산함. 장소는 식당이었음.
아빠가 알려 줘 시작한 피파게임에서 아빠피셜 천재성을 보임. 나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십 수년을 피파에 몸 담은 아빠와 현격한 실력차이를 보이는 것은 확실함.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말. 이론과 실기 동시에 추구하는 편.
영어 사교육을 중1 후반기에 비로소 시작. 중2 첫 영어시험에서 50점대였는데 중3 기말시험에 99점으로 마무리함. 바닥이 낮으니 올라올 곳이 많음.
영어 과외 숙제를 하도 안 해와서 선생님이 하다 하다 벌금제까지 도입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날밤을 새워 숙제를 끝냄. 새벽 3시, 5시까지 함. 갑자기 왜 숙제를 다해가는지 알 수 없음. 확실한 건 돈 때문은 아님(벌금은 엄마 찬스 씀).
초3 때까지 글씨를 정말 못 썼는데 어느 날 '글씨를 잘 써야겠다'더니 갑자기 글씨를 천천히, 잘 쓰기 시작함. 노트 정리 한 거 보면 액자에 끼워 걸어 놓고 싶어 짐.
초1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지금 9년째 배우고 있음. 피아노에 탁월한 재능은 보이지 않으나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임. 혼자서는 주로 여자 아이돌 노래를 피아노로 침. 항상 헤드폰을 끼고 쳐서 들어본 적은 별로 없음. 야밤에도 가끔 피아노 침.
아빠가 줄넘기 학원을 열면서 6학년 때 줄넘기에 입문. 중1 때 경남 스포츠클럽 2단 뛰기 단체전, 개인전 1위 함.
중3 교내 2단 뛰기 줄넘기 대회, 첫 시도에서 2백 몇 개를 했는데 다른 애가 자기보다 몇 개를 더 많이 함. 꼭 1등 하고 싶다더니 다음 시간에 400개를 뛰어 넘사벽을 만들고 옴. 2등 한 애가 자기 보고 '또라이'라고 했다고 함. 2단 뛰기 400개면 죽을 동 살 동 뛰었다는 말.
중2 때 도덕 시험을 모두 100점을 받아 교과목 우수상을 받아옴. 도덕은 인성과 상관없구나라고 놀렸더니 정확하다고 맞받아침. (참고로 나도 중3 내내 도덕만 만점. 도덕은 인성과 상관없음이 확실함.ㅋㅋ)
큐브 맞추기에 꽂혀서 집에 온갖 종류의 큐브가 있음. 25초인가? 기록 한번 세움. 지금은 전시만 하고 있지만 볼 때마다 신기함.
초등학교 입학 할 때 주일학교에서 성경책을 선물로 줬는데 어린애가 모세 5경까지 혼자 다 읽음. 구약은 어려우니 신약부터 읽으라 해도 처음부터 읽어야 된다면서 만날 성경책만 읽고 있었음. 시킨 거 아님.ㅋ
중1 때 교회에서 한 달 큐티하기 훈련을 했는데 끝나고도 혼자 1년을 꼬박 채움. 1년 동안 매일 큐티하고 사진 찍어 선생님께 보냄. 어떤 때는 밤 12시에도 사진 찍어 보냄. 선생님이 너 같은 애 처음 봤다고.(그때 레야는 1년 동안 자기 전 기도하기를 혼자서 함. 신앙생활은 엄마가 제일 게으름.)
지금 생각나는 것은 여기까지. 언젠가 한 번은 이런 기록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나씩 하나씩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도 언젠가 인생의 시련을 만나고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무력감과 깊은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을 텐데 그때 이 글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네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였는지, 얼마나 싹수가 보이는(?) 아이였는지 기억하고 다시 한번 일어나 도전해 보라고.
오늘은 아이의 성공 기록을 주로 적었지만 그 사이사이에 수많은 실패의 기록들도 있다. 꼴찌의 기록도 몇 번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만큼 수많은 도전을 했다는 것이다.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도 실패도 그 어떤 경험도 할 수 없다.
'나도 그랬을까? 나도 엄마 아빠 보기에 대단한 아이였을까? 한 명이라도 나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기대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삶을 대충 흘려보내며 살 수 있을까?'
남편은 요즘 부쩍 잠을 설친다. 새로 시작하는 축구학원 때문에 온통 신경이 거기 가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설렘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물었더니 반반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해 온 일 중 제일 설렌다고 했다. 도전하고 밀어붙이는 사람 여기 한 명 더 있었네. 뿐만 아니라 피아노 1도 못 치던 사람이 밤낮으로 건반만 붙들고 살더니 교회에서 세컨피아노를 친다. 틈만 나면 연주 영상을 분석하고 연습한다. '애드리브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 같다, 악기 소리가 너무 많이 바뀐다'라고 했더니 코드만 치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실수해도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단다. 진짜 미를 치는 사람의 원조가 여기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