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이(중3), 레야(초6)
글램핑을 다녀왔다. 온 가족이 같이 가려고 예약했는데 남편의 축구학원 오픈과 겹치는 바람에 아이들과 나만 다녀왔다. 글램핑장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거리가 가까운 것도 좋고 물놀이장이 3개나 있어 아이들이 옮겨 다니며 원 없이 노는 것도 좋았다. 저녁 바비큐도 다양하게 주고 아침에는 미역국도 나왔다. 널따란 잔디밭에 무드 있는 조명, 기분 좋은 침구상태까지. 지금껏 다녀본 중 단연 1등이었다.
사실 물놀이를 낀 여행을 가면 대부분 나는 한시도 앉아 있을 틈이 없다. 물놀이 용품 챙겨 주랴, 사진 찍어 주랴, 간식에, 식사에, 수영복 탈의에, 숙소 들어올 때 애들 옷에서 떨어진 물 처리에... 이번에는 아빠가 없어서 할 일이 더 많았다. 게다가 지나치게 에너지 넘치는 두 녀석이라 혹시 다칠까, 남들에게 피해 줄까, 물놀이하는 동안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지켜보는 일은 내 즐거움이기도 하다.)
저녁을 먹이고 먹는 모습 사진 찍어 아빠에게 보내고 먹고 난 뒤처리까지 한 다음 꼭 배드민턴을 치고 싶다는 레야를 데리고 한참을 배드민턴 치고 왔다. 땀에 절은 몸을 씻기 위해 방에 들어갔다가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잠시 침대에 누웠다.
"엄마 처음 눕는 거죠?" 레야가 말했다.
"어, 그러네."
잘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는 처음으로 휴식이란 걸 한다. 여행 내내 집에서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애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감시간까지 꽉 채워서 물놀이하고 온 아이들을 보니 여기 온 것이 뿌듯해진다. 왜일까? 내 안에 어떤 힘이 나를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걸까? 남편이 물 달라하면 노려보는데 애들이 물 달라하면 밥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 진다. 책임감? 아니 그것보다 더 적극적인 반응이다. 내 것에 대한 애착?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노력이 아니다. 내 몸속에 기본적으로 세팅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성경의 사랑장이 그냥 온몸으로 넘쳐흐른다.
남편은 가끔 내가 아이들을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것 같다고 한다.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끼고 키워도 애들은 떨어질 나이가 되니 떨어질 준비를 한다. 퍼 주어도 아깝지 않고 애들한테 바보 취급(?) 받아도 상처받지 않고 미운 짓을 해도 자는 모습만 보면 마음이 싸악 녹아내리는 이런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랑수업'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오랜만에 인문학책을 골랐다. 정신의학과 의사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해석해 놓은 책인데 이상하게 이 책이 끌렸다. (아직은 원론적인 내용뿐이라 사실 완독할 자신은 없다.) 아이를 대하는 내 태도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면 나는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신앙교육을 따로 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신앙교육은 나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듯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신앙교육이고 나의 가장 큰 임무라고 생각한다. 다른 교육들은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이미 잘해 주고 계신다.(나는 언제나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고맙고 또 고맙다.)
부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전에 내가 알던 한 친구는 신앙생활 초기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그렇게 거슬렸다고 한다. 그에게 아버지는 상처와 고통의 이미지일 뿐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부모를 통해 느낀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그 사랑을 부모의 마음속에 심어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를 통해 조건 없는 사랑을 느끼고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로 태어났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믿음과 사랑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께로 이어져 아이의 신앙과 자존감에 든든한 뿌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외 아이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사람이나 인생행로는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내 신앙교육관은 그게 다다.
부모가 되길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내 평생 사는 동안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해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사랑을 주면 줄수록 또다시 사랑이 채워지는 신비로운 경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