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행복독립

아무리 해도 비는 정이 들지 않아

레야(초6)

by 최여름

레야가 개학을 했다. 나는 아직 이틀 남았지만 아이를 합천까지 통학시켜 줘야 한다. 방학 내내 11시 혹은 12시가 되어야 일어나던 우리의 천재 작곡가님께서 오늘은 깨우지도 않았는데 7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신다. 레야는 어젯밤에도 자신이 작곡한 거 선생님께 들려 드린다고 늦게까지 녹음을 했다. 7곡 중에 3곡을 저장했단다. 이제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웬만한 프로그램은 알아서 깔고 사용한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진주에서 이 정도면 합천 가는 길은 1.5배는 더 쏟아진다. 장거리 출퇴근을 하다 보니 이런 악천후를 만날 때가 종종 있다. 역시나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돌발적으로 이쪽저쪽에서 물보라 천지다. 차 지나갈 때 물 튕기는 것을 뭐라고 부르나? 그야말로 물쇼가 따로 없다. 기어가듯이 겨우겨우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은 다행히도 비가 많이 잦아들었다.

진주 가까이 왔을 때쯤 한 무리의 경찰차들이 보였다. 사고가 났나 보다. 상대편 차선에서 미끄러졌는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차가 이쪽 차선 1차로를 다 차지하고 있다. 구급차는 벌써 다녀간 모양이고 레커차가 막 도착을 했다. 학교 갈 땐 없었으니까 내가 지나가고 얼마 안 있어서 사고가 난 모양이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8년째 이 길을 지나다니면서 제법 많은 사고를 목격했다. 빗길에 풍뎅이처럼 완전히 뒤집어진 차도 본 적 있었다. 뭐 하러 가는 길이었는지 몰라도 누군가의 삶이 잠시 멈춰 섰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다쳤는지 알 수 없지만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을 것이고 평온한 삶을 살던 가족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상황 앞에 그 사람이 차를 타고 달려가던 그 목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얼마 전 작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에게도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뜬금없이 목디스크 판정을 받았고 보험사와 합의를 해야 하는 우울한 일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내 기도가 조금 더 절실해졌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다. 내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막연한 믿음으로 안전이나 건강에 대한 기도는 잘하지 않았었다. 뭐랄까, '복 주세요' 하는 기도처럼 하나님의 섭리나 도움을 믿지 못하는 행동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제 건강과 안전에 대한 기도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이 되었다. 아기들은 때가 되면 엄마가 밥을 줄 것을 못 믿어서 우는 게 아니다. 배고프면 울어서 표현해야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나온다. 그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가 자신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사고가 나 보니 하루하루 내 삶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못 믿어서가 아니라 간절해서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브런치를 먹으러 들른 카페의 창문을 타고 빗방울이 흘러내린다. 비가 몰아쳤다 멈췄다를 반복한다. 누군가에겐 생사를 오가는 기로에 서게 했던 잔인한 비가 지금은 잔잔한 음악에 묻혀 낭만의 옷을 입었다. 비야, 네가 오늘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고 시치미를 떼는 거냐.


내 옆에서 한 엄마가 1, 2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와 방학숙제를 시키고 있다. 이 넓은 카페에 나랑 그 모자밖에 없어서 이야기가 다 들리는데... 속이 부글부글한다. 아이의 숙제를 봐주는 건 좋은데,

'이렇게 해, 저렇게 해, 다시 지워, 이렇게 하라니까, 브이 말고 동그라미 하라니까...' 무슨 성능 안 좋은 기계 다루듯이 버튼 누르고 기계 두드리고 안 먹히니까 전원 껐다 켰다 반복하는 것 같다. 부모님들, 제발 완벽하게 잘하는 데 목표를 두지 마세요. 방학숙제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지금 아이와 함께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아이가 지금 잔뜩 주눅들어서 엄마 눈치 보잖아요.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너는 어떻게 할래? 지울까, 그냥 둘까? 와~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말만 조금 바꾸어도 아이는 엄마랑 숙제하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어제 레야가 영어로 일기 쓰는 숙제가 있다면서 부랴부랴 쓰는데 일요일을 il yo il이라고 적어서 빵 터졌다. 너는 선데이도 모르냐고 하면 아이는 다시 나에게 일기를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또 I eat를 I am eat이라고 쓴다. 흔히 하는 실수다. 얀이도 중학교 들어가서야 겨우 고쳐졌다. 괜찮다. 그렇게 좀 쓰면 어때? 박나래 말처럼 영어도 '기세'다. 얼마나 기세등등한지 자기가 만든 모든 곡이 다 영어로 되어 있지 않나. 레야의 가장 최근 곡은 'Last protection'이다. Sunday는 몰라도 자기가 사전 찾아서 제목 붙인 것들은 그 뜻을 다 기억하고 있다. 필요하면 다 찾아서 한다. 나는 그저 옆에서 '우와~, 우와~'만 해주면 된다. 처음 걸음마 배울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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