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이(고1)
얀이가 10일 동안 캄보디아로 단기선교를 떠났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떠난 선교여행인데 얀이는 출발도 하기 전에 가방을 잃어버렸네, 뭐를 잃어버렸네 아주 그냥 걱정과 근심을 한가득 나에게 짐으로 남겨 놓고 떠났더랬다. 경유 장소인 베트남 공항 모습이 단체 톡에 올라왔는데 벌써부터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저 모자는 분명 캄보디아 도착하기 전에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얀이는 구멍 난 가방의 소유자다. 그래서 미리 가방 싸면서 아이의 옷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서 남겼다. 얼마 전 수련회 때도 이른 아침부터 바닥에 널브러진 옷사진 하나를 보내며 '이 옷이 제 것이옵니까?' 하던 아이기 때문이다. 1박 2일이라 여벌옷이라고는 그거 하나밖에 없었는데도 자기 옷이 뭔지 모르는 아이니 자그마치 10일 치를 어떻게 기억하랴. 그래서 아예 사진으로 찍어서 폰에다 박아 주었다. 그래도 이들 중 몇은 캄보디아와 한국 사이 어딘가에 미아로 남겨질지 모른다. 여권을 일괄로 맡아 관리해 주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그렇게 새벽같이 떠나보내고 밤이 되니 부모 단톡방에 그날의 사진과 동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첫날 저녁부터 현지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했다. 캄보디아 결혼식은 사진으로 보기에 '태어난 김에 세계 일주'에 나오는 인도 결혼식과 비슷해 보였다. 밤에 먹고 춤추고 함께 즐기는 화려한 시골 잔치 같은 그런 느낌. 사진들 사이로 동영상 하나가 올라왔는데 거실에서 영상을 먼저 본 남편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TV에 뭐 재밌는 거 하나 싶었는데 웃음의 유발지는 그 동영상이었다.
결혼식장에 어떤 남자애가 음악소리에 심취해서 여자애 하나를 붙들고 춤을 추고 있었다. 얀이었다. 얀이는 음악에 맞춰, 아니 음악과 상관없이 출처를 알 수 없는 막춤을 신나게 춰대고 있었다. 한껏 흥이 올라 정신없이 춤을 추는 얀이에게 희생된 여자애는 함께 간 사촌동생이다. 부끄러워하는 그 애의 손을 잡고 한 바퀴 돌리고 혼자 신나서 또 추고... 아예 얀이 주변으로 사람들이 동그랗게 물러서서 영상을 찍으며 웃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남의 잔치집에서 얀이는 주변의 현지인보다도 훨씬 더 신나고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얼굴에는 즐거움과 환희가 가득했다. 저게 새벽 5시에 출발해 베트남을 경유하고 버스를 몇 시간이나 타며 낯설고 낯선 곳으로 간 아이의 첫날 텐션이란 말인가...! 저렇게 똘끼 가득한 아이가 내 아이라고? 우리 부부는 몇 번이나 동영상을 돌려 보며 신기해했다. 태세계에 나오는 기안84의 모습이 생각났다. 남편에게 기안84의 인도결혼식 영상을 보여줬더니 그보다 더한 것 같다고 했다. 나와 친한 지인들에게도 동영상을 보여 주었더니 모두들 하나같이 감탄(?)을 했다. 그중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춤을 추네요."
나는 지인의 그 말이 너무 좋았다. 그보다 더 딱 맞는 표현은 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좋은 것을 표현하고 즐길 줄 아는 모습이 멋지다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무엇보다 얀이가 즐거워 보여서 좋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처럼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기쁨을 기쁜 만큼 표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아이는 그렇게 춤을 추고, 얼굴은 나만 붉어지면 되는 것이다.
선교여행과 그 앞의 신입생 환영회, 수련회를 위해 아이는 방학을 다 쏟아부었다. 거의 매일 같이 회의를 하고 공연 준비를 하고 기도와 예배를 드렸다. '이번 방학은 교회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하더니 진짜 그렇게 했다. 아이는 자기 가방 하나 야무지게 챙길 줄은 몰라도 자신이 꽂힌 것, 책임 지고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집중했다. 선교지에서 할 문화공연을 위해 줄넘기 안무를 짜고 사촌동생이랑 틈틈이 연습을 했다. 무언극을 준비할 때는 매일같이 교회에 가서 연습했고 안 나온 애들 것까지 일인 다역을 할 정도로 분석하고 연습했다. 무언극에 필요한 의상과 소품 구입도 얀이 몫이었다. 사소한 샤프 하나도 나에게 사달라고 맡기던 녀석이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고르고 하는 게 신기했다. 이제 보니 인터넷 쇼핑 할 줄 아는 놈이었구만! 그렇게 방학이어도 아이는 매우 바쁘게 살았다. 학원, 과외, 교회. 이 세 사이클을 불평 없이 해냈다. 아니 어느 때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생기가 넘쳤었다. 남편과 나는 바쁜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고 그러면서 또 부러웠다. 우리도 저렇게 열정이 넘쳤을 때가 있었더랬지? 하면서.
캄보디아에서 간간이 보내오는 사진과 영상 속에서 아이는 언제나 표정이 밝았다. 문화공연에서 줄넘기도 썩 잘 해내고 있었고 다른 팀이 사물놀이 할 때도 관중석에서 제일 신나게 호응해 주고 있었다. 물론 같이 간 다른 아이들도 다 즐거워 보였다. 음식이며 날씨, 화장실 등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도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인 듯 함께 있기만 해도 즐거워 보였다.
아이들은 로밍이나 현지 유심을 사서 쓰지 않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연락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얀이가 언젠가 읽게 될 장문의 톡을 하나 보냈다. 보고 싶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과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는 말을 남겼다.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너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스스로 계획하고 책임지는 모습이 멋있어서라고 했다. 나는 해준 게 별로 없는데 잘 커주고 있어서 감사하다고도 했다. 얼마 후 내 문자에 하트 하나가 달렸다.
그렇게 열정을 쏟아부은 여행이 끝난 뒤 아이는 다시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지루한 과제와 톱니바퀴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일상의 진부함 속으로 말이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공연이 끝난 후의 헛헛함이 아이를 맞이할 수도 있겠지. 그럴 때 아이는 분명 지금을 그리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리움과 추억이 아이에게 그 하루를 견딜 힘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아이가 부럽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것처럼 춤을 출 수 있는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