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이(고1)
얀이가 돌아왔다! 9박 10일 치의 이야깃거리를 잔뜩 안고. 봄비 같은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에 더운 나라에서 온 걸 인증이라도 하듯 바람막이 정도만 걸친 아이들이 버스에서 커다란 캐리어와 함께 쏟아져 내렸다. 얀이는 나와 잠깐 눈인사만 하고 캐리어를 끌고 일행들과 같이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 입구에 차를 대고 기다리는데 아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다. 혹시 중고등부 찬양 연습까지 하고 올 거냐고 아이에게 문자로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했다. 모른다고? 찬양팀이 뭔가 복잡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은 하나 둘 교회를 떠나는데 아이는 교회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는다.
공항에서 오는 동안 찬양팀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내일이 주일이라 찬양 연습을 해야 하는데 인도를 맡은 아이가 콘티를 새로운 곡으로 전부 짰다는 것이다. 단기선교를 갔던 찬양팀이 새로운 곡을 다 준비하는 것은 무리였다. 몸도 피곤하고 연습 시간도 세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중 몇 명이 아예 콘티를 새로 짜서 보냈고 리더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단다. 급기야 감정대립까지 갔고 '그럼 우리는 못한다' '빠질 테면 빠져라 혼자라도 한다' 뭐 그런 스토리... 그 갈등 가운데 낀 얀이는 매우 마음이 불편했다.
일단 식당에서 뜨끈한 소고기국밥으로 늦은 아침을 채우고 집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얀이는 몸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캄보디아에서는 비상약을 열어 보지도 않을 정도로 몸이 건강했는데 마치고 오는 길에 약한 감기를 달고 온 듯했다. 무조건 쉬어라 하고 있는데 아이는 계속 콘티로 올라온 곡을 들으며 연습을 갈지 말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수만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해? 말어? 하자니 시간도 몸도 엄두가 안 나고 안 하자니 계속 마음이 걸리는 것이다.
"아니,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같이 욕먹었어요."
"그냥 콘티를 바꿔 달라고 하면 되는데 이 곡, 저 곡 아예 곡을 정해 말해서 리더가 화난 것 같아요."
"곡을 연습하자니 시간이 없고 모르는 곡도 있고, 하던 곡으로 하자니 곡을 편식하는 것 같고..."
"선교팀 다 안 하는 걸로 했는데 나만 또 가서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 그 생각만 하는지 캄보디아 얘기보다 그 얘길 더 많이 했다. 극 E에 극 T까지 겸비한 얀이가 누군가와의 관계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 매우 낯설었다. 서운할 정도로 쿨내 나고 단순하던 녀석이 아니던가.
다음 날 얀이는 결국 안 할 게 분명한데도 기타 이펙터와 페달을 챙겨서 교회에 갔다. 다른 집사님이 기타를 맡기로 한 걸 들었지만 그럼에도 혹시 몰라 장비를 다 챙긴 것이다. 한 번쯤 편히 내려놓아도 될 텐데 아이는 이도 저도 아닌 불편한 마음으로 예배 자리에 앉아 있을 듯했다.
신앙생활이든 삶이든 참 그렇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캄보디아 오지에서 고생하며 마음을 한 뼘 키워 왔지만 정작 마음을 더 크게 흔드는 것은 일상의 사소한 오해와 갈등이다. 큰 장애물은 눈에 보이니까 이기든지 피하든지 할 수 있지만 작은 돌부리는 눈에 띄지 않아 걸려 넘어지기 더 쉬운 법이다. 지금 얀이는 큰 은혜와 작은 불편을 함께 겪고 있다. 작은 불편을 잘 다루지 않으면 그게 자라 모든 기쁨과 감사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 나는 매우 감성적이고 생각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라 나에게는 인간관계에서 겪는 어느 것 하나도 '작은 일'이라는 것이 없었다. 수련회 다녀와서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내 특기이자 루틴이다. 그러나 나는 얀이가 나보다 더 슬기롭게 이 곤란을 잘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며 자신이 가진 소중한 은혜를 잘 지켜나갔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도, 자신에 대한 자책도 하지 말고 좋지 않은 감정들이 마음속으로 스미지 않고 마음 밖으로 흘러가게 그렇게 두었으면 좋겠다.
사실 아이보다 내가 더 심각한지도 모르겠다. 실수도 실패도 겪을 일은 다 겪고 가야 하는 법이다. 정답이든 오답이든 답은 아이 스스로 찾아야 경험이라는 것으로 쌓일 것이니 나는 잠자코 지켜만 보기로 한다. 아이가 무사히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감사는 넘친다. 거기에 뭘 더 바라랴. 너에게 바로 시험이 오는 것을 보니 네게 은혜가 있었던 것이 맞긴 하구나.
그날 저녁, 얀이는 리더에게 장문의 톡을 보냈다. 사과의 말과 함께 오해에 대한 해명을 구구절절 길게도 썼다. 얀이는 신중하게 글을 쓰고도 나에게 검수(?)를 요청했다.
"이건 싸우자는 건데?"
"이게 왜 싸우자는 거예요? 저도 피해자라고요."
아이의 마음은 알겠지만 상대는 여자아이다. 이렇게 사실만 적시한 글로는 또 다른 오해를 불러오기 딱 좋았다. 본인도 그게 신경 쓰이니까 나에게 미리 보여줬겠지. 나와 얀이는 한동안 옥신각신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고치고 또 고쳤다. 더 이상의 오해나 부정적인 감정의 실마리를 줘서는 안 되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얀이는 답장이 올 때까지 안절부절 못했다. 뭔데, 연애편지 보낸 것도 아닌데 저렇게 쫄다니...
"엄마, 왔어요. 왔어."
아이는 어디에 당첨된 사람처럼 신나서 뛰어 왔다.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얀이의 편지를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오해했던 것과 자신이 경솔했던 것을 제법 어른스럽게 인정했다. 앞으로 더 잘 지내보자는 말로 끝을 맺었다. 얀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마음 편히 쉴 수 있겠어요. 다른 애들도 알아서 화해하겠죠? 나는 끝났어요."
"축하한다. 고생했다. 근데 이 여자애 진짜 글 잘 쓴다. 같은 학년 맞아? 누나 같은데?"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나는 아이의 마음고생이 끝난 것을 축하했다. 이로써 얀이는 이제 더 깊고 오묘하고 복잡한 인간관계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그리고 우리도 비로소 캄보디아 여행 스토리를 신나게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