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이(고1), 레야(중1)
며칠 전 나의 생일이 지나갔다. 영원한 '남의 편' 님께서는 올해도 내 생일을 잊어버리셨나 보다. 늦은 저녁을 혼자 차려 먹고 있을 때도 아무 말이 없더니 뒤늦게 알아챘는지 9시가 넘어서 겨우 케이크 하나 사들고 왔다. 참나, 언제쯤 나는 생일 다운 생일을 맞아 보려나. 서로 뒤늦게 정보 교환을 했는지 레야도 A4 용지에 연필로 휘갈겨 적은 편지를 들고 들어 온다. 기념일마다 레야는 편지를 가득 적어서 준다. 봉투도 없이 쪽지처럼 접어 주는 편지였지만 지면을 가득 채운 정성에 편지를 읽어 본다. 가슴이 아파온다. 온통 미안하다는 말 뿐이다. 엄마를 너무 사랑하지만 마음과 달리 반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되어 늘 후회한단다. 편지만 봐서는 죄인도 이런 중죄인이 따로 없다.
얀이의 과외가 있어 다 마치고 가족이 모인 시간은 10시가 훨씬 넘어서다. 이 시간에 케이크 달랑 하나 두고 둘러앉았는데 이걸 생일파티라고 쳐줘도 되는 거야? 화를 낼까, 웃어넘길까 고민을 한다. 세 남자들은 내 눈치를 보느라 케이크 주위로 긴장감이 맴돈다. 그러게 잘해라 쫌.
나는 적당히 모른 척 구색을 맞춰 주었다. 눈치 없이 야밤에 경쾌한 생일축하곡을 트는 남편을 째려봤더니 곧바로 잔잔한 음악으로 바뀌었다. 남자 셋이서 참으로 어색한 생일축하곡을 불렀다. 그리고 나는 차분히 말을 꺼냈다.
"음.. 엄마 생일이니까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지? 부모와 자녀 사이에 필요 없는 감정이 있는데 그게 바로 미안함과 죄책감이야. 서로에게 미안해서 더 잘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더 부담스럽게 만들어. 그런 관계는 더 가까워지지 않아."
눈치 빠른, 아니 눈치가 없어도 눈치챌 만한 이야기에 레야가 "어? 누구 겨냥한 것 같은데."라고 말한다.
"아니야, 네 편지 때문에 하는 말 아니고 내가 늘 생각하던 거야. 나는 너희가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 안 가졌으면 좋겠어. 엄마는 너희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행복했고 너무너무 고마워. 만약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생겨서 갑자기 엄마가 너희 곁을 떠난다고 해도(울컥) 절대로 엄마에게 미안함이나 죄책감 가지지 마. 왜냐면 나는 정말 너희들 때문에 행복했으니까. 정말이야. 나는 너희를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다니까.
그리고 엄마도 너희들에게 미안한 마음 가지고 있지 않아.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너희를 키웠지만 그렇다고 내 삶을 올인하진 않았어. 적당히 내 인생을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하고 싶은 만큼 너희를 키웠어. 그러니까 조금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미안하지는 않아. 너희도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고."
묵묵히 듣고 있던 얀이가 고개를 진중히 끄덕인다.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착각인지 몰라도 아이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다.
"레야 편지 너무 고마운데 다음에 너희가 어버이날이나 엄마에게 편지할 일 있을 때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 썼으면 좋겠어. 낳아주셔서 고맙다는 말 쓰기만 해 봐. 낳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우려먹고 있어."
"그럼 어떻게 써요?"
"음... 엄마가 좋은 점을 써줘. 엄마도 칭찬을 받고 싶어."
"엄마 예뻐요 이런 거요?"
"응. 그런 거 써줘. 엄마 자존감이 팍팍 올라갈 수 있는 거."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거짓말도 써요?"
"야이~ @#$%&야! 거짓말이라도 써! 아빠 편지에는 아빠 좋은 점만 쓰더니 내 편지는 맨날 미안하다는 말 뿐이야. 나도 칭찬 좀 해달라고."
분위기가 간질간질하면서 촉촉해져 간다. 이럴 때 하고 싶은 말 다 해야겠다.
"그리고 선물이라는 건 말이야. 나한테 필요 없는 거나 내가 먹기 싫은 거를 쓰레기 처리하듯 주는 게 아니야. 오늘도 급식 시간에 평소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와서 후식으로 나온 거 나한테 선물이라면서 주더라. 딱 봐도 먹기 싫으니까 주는 건데. 선물은 나에게 소중한 것,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는 게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남편)씨, 다음 내 생일 땐 꽃다발이나 반짝이는 뭐라도 딱 하나 사들고 와라. 케이크만 달랑 들고 오면 죽는다."
"알았어.ㅋ"
그렇게 나의 한량없는 아량으로 아슬아슬한 생일파티를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케이크를 나누어 먹고 잠자리에 들려고 준비하는데 얀이가 내 방으로 와서 뭔가를 내밀었다. A4 종이를 편지 봉투처럼 접었는데 겉면에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문구가 예쁘게 프린팅 되어 있었다.
"와, 뭐야? 편지야?" "열어 보세요."
접착제 없이도 잘 접혀 있는 종이봉투를 열자 5만 원권이 튀어나왔다.
"엄마가 나에게 소중한 것을 선물하는 거라고 해서 저에게 소중한 것을 넣어 봤어요."
나는 아들의 말을 듣고 그야말로 박장대소를 했다. 지금껏 이렇게 웃기고 감동적인 선물은 처음이다.
"나 처음으로 아들한테 용돈 받은 거야?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써? 하하하하"
나는 그렇게 한참을 봉투와 아들을 번갈아보며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며칠 후 얀이방에서 놀고 있는데 컴퓨터를 하던 얀이가 뭔가 생각난 듯 인터넷 검색 목록을 보여 주었다. 봉투에 적힌 그 문구와 예쁜 디자인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검색어를 입력했었는지 보여 주었다. 아무거나 대충 주워 만든 편지봉투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이번 생일을 보냈다. 비록 10시부터 12시까지 채 2시간밖에 누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쩌랴. 내 진심을 전하고 아이들의 진심을 받았으니 나는 그걸로 가슴이 뭉클하다.
아이들은 이렇게 하나씩 가르쳐 가면 되는데 몇 년째 변화 없는 이 남편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내년에는 주변 꽃집이라도 찾아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