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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복독립

나의 엉뚱하고 멋진 모험가

얀이(고1)

by 최여름

선교여행도 끝나고 이런저런 수련회도 끝나고 학교 종업식도 다 끝나 드디어 아무런 스케줄이 없게 된 얀이. 갓생을 살겠다며 한 이틀 뛰러 나가더니 어느 날 아침은 패딩에 목도리, 장갑까지 착장하고 집을 나선다. 어디 가냐고 물어도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점심때까지는 들어오겠노라고 했다. 아침이라도 먹고 가라 했더니 나가서 먹겠다고 했다. 얀이가 갈 만한 곳이면서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 PC방? 남편은 쟤가 혼자서 PC방 갈 애는 아니라고 했다. 하긴 아빠가 같이 가자고 할 때만 가지 친구랑도 잘 안 간다.

첫날은 수곡까지 갔다 왔다고 한다. 첫날이라 함은 그다음 날도 그 그다음 날도 아이의 의문스러운 외출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얀이는 목적이나 이유를 알려 주는 대신 어디까지 다녀왔는지 행선지만 알려 주며 우리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어떤 날은 진양호 근처, 어떤 날은 반성, 대곡, 금산... 수수께끼 하듯 띄엄띄엄 알려 주고는 거기까지 왜 가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마치면 말해주겠단다.

어떤 날은 버스를 8번 갈아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모르는 사람 차를 얻어 탔다고 해서 우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도 했다. 한 번은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버스정류장 40개를 지났다고도 했다. 진주시를 구석구석 다 돌고 있는 건 확실한데 도대체 왜? 갑자기 우리가 사는 세상이 궁금해졌나? 외국물(?) 먹고 오더니 세상에 대한 관심이 생겼나? 우리는 마치면 알려 주겠다는 아이의 탐방 보고를 기다리는 것 밖에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여전히 바람이 차가운 겨울 속을 돌아다니던 얀이는 결국 가벼운 감기 기운에 하루를 몽땅 쉬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자 다시 또 떠났다. 나는 아이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뭔가 멋있기도 해서 집을 나서는 아이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보였다. '무엇을 하든 너를 믿어!'

한 5일쯤 다녔나? 마지막은 금산에 있는 군부대가 궁금하다며 버스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더니 이제 끝났다고 했다. 나는 아침 식탁에 앉은 아이에게 찍어 온 사진과 탐방보고를 종용했다. 얀이는 별말 없이 '고등학교'라고 적힌 앨범을 보여 주었다. 아이가 어딜 그렇게, 왜 그렇게 다녔는지 그것만으로 설명이 다 되었다.

"진주에 고등학교가 참 많더라구요. 고등학교 다 찾아가 보는 게 목표였어요."

"아...! 고등학교가 23개나 돼?"

"그러니까요. 많더라구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물었지만 '그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날 내가 다니는 학교 외 다른 학교는 어떤 게 있는지 궁금했던 아이가 모든 고등학교를 직접 다 찾아가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얀이는 네이버 지도에 나타난 모든 학교를 매일 구역별로 나누어 탐방을 떠났고 학교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름 계획도 철저하게 짰는지 메모장에는 동선과 교통편, 예상소요시간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아이는 모든 계획을 오롯이 혼자 완수하고 싶어서 내가 몇 번 태워 주겠다고 하는 것도 마다했었다. 나는 이 특이하고 멋진 아이에게 또 한 번 감탄하고 말았다.

"너 다음에는 전국으로 다녀. 대학 가면 알바한다고 시간 보내지 말고 세계로 여행 다녀."

아이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전국구 정도는 계획에 있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남편과 이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 특이한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

"생각 안 나? 나도 저번에 혼자 2박 3일 동안 남해 책방 투어 다녀왔잖아. 나 닮은 거지." 나는 놓치지 않고 유전자의 공로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얀이가 고2가 되면서 슬슬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아이의 성향이나 장점들을 고려할 때 교대가 제일 낫다며 남편은 그쪽으로 유도해 보자고 하는데 나는 반은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있다. 뭔가 딱 정해진 길보다 한 번쯤 아이를 세상에 그냥 던져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다. 얀이는 무엇이 되고 어떻게 살지 정말 가늠이 안 되는 아이이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길을 뚫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불확실하고 불안한 세상 속에 있다 보니 무작정 부딪쳐 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멋진 탐험가를 일방통행 선로에 태우자니 그것도 선뜻 내키지 않는다. 사실 뭐... 이런 고민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얀이는 자신의 삶에 누구보다 진심인 아이이고 원래도 순순히 우리말 듣는 애가 아니란 걸 자꾸 잊는다.



KakaoTalk_20250408_164658151.jpg 얀이가 직접 가서 찍어 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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