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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복독립

욕 좀 해본 엄마 2

얀이(중3)

by 최여름

'욕' 하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얀이의 중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이다. 아침에 얀이가 느릿느릿 챙기길래 졸업생들은 몇 시까지 가야 되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단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아니 아들아...

"졸업식이 10시까지니까 9시 반까지 가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그럼 엄마가 태워줄게. 태워주고 조금 일찍 기다리지 뭐."

나는 그래도 뭔가 좀 불안한 마음에 9시까지 학교에 가자고 하고 아이를 차에 태웠다. 학교에 거의 다다랐을 때 얀이 휴대폰에 담임선생님의 이름이 떴다. 순간 나는 바로 알았다. 그 시간 아니다. 이 놈 사고 쳤다...

"얀아, 너 지금 어디야?"

선생님은 일단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의 위치를 물었다.

"지금 학교 거의 다 왔어요."

아이의 안전과 소재를 파악한 선생님, 이내 본론을 말씀하신다.

"야이, 미친 새끼야! 학생은 원래 오던 시간대로 와야지!"

"9시 반까지 아니었어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학교 문 앞이에요."

선생님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뚫고 나왔다. 그러나 아이는 선생님의 반응이 익숙한 듯했다. 곧이어 뭔가 쎄한 느낌을 감지한 선생님.

"... 혹시 어머니 차 타고 오니?"

"네."

"아, 어머니 그게..."

"네, 선생님. 얀이가 시간을 잘못 알았나 봐요. 지금 데리고 들어가고 있어요. 호호"

나는 충격을 받기보다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아이의 학교 생활이 이 하나로 다 상상이 갔다. 북한군도 막아낸다는 무시무시한 중딩들을 다루는 선생님께 저 정도 욕은 면책권을 주어야 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아이가 졸업식날 학교를 안 오니 얼마나 애가 탔겠는가. 우리는 아침에 들은 욕 따위는 잊고 선생님과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고 얀이는 졸업식 끝나고 눈물을 쏟았다. 울었다, 우리 아들이. 그 귀한 눈물을 졸업식날 보여 주었다. 사랑스러워 죽을 뻔.

아이들이 즐겨 보는 게임 유튜버들의 영상도 보면 거의 대부분 욕이 난무한다. 심한 사람은 숨 쉴 때마다 '신발, 신발...' 한다. 처음에 그런 욕들이 나올 때 아이들은 내 눈치를 봤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소리를 키워 놓고 영상을 시청한다. 욕한 놈이 잘못이지 듣고 있는 놈이 잘못인가. 그래도 어느 날은 너무 심해서 내가 결국 한마디 했다.

"얀아, 어쩜 그 게임 유튜버들은 그렇게 창의성이라고는 1도 없냐? 우리 때도 신발 신발 했는데 아직까지 신발 신발이야. 욕도 좀 창의적으로 할 수 없나? 그게 무슨 크리에이터야. 욕도 필요할 때 딱 한 방으로 날려야 임팩트가 있는 거지 말 끝마다 갖다 붙이면 얼마나 없어 보이냐고."

욕을 제대로(?) 못한다고 열불 내는 엄마를 보고 아들은 피식 웃는다. 안 쓰려면 아예 쓰지 말고 쓰려면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나의 욕에 대한 지론이다. 나도 사실 중학교 이후로 욕을 쓸 일이 없었다. 주위에 온통 나같이 순둥순둥한 친구들 밖에 없었고 교사가 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아들만 둘을 키우면서 숨겨 놓았던 내 안의 잠룡들이 슬슬 깨어나기 시작했다. 가끔 나는 약간의 해방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솔까 자꾸 미를 치는 세상에 미를 쳐대는 사람이 한 둘이던가. 욕을 부르는 세상이다.

나의 판단이 맞다면 우리 아이들은 집에서 가장 욕을 많이 한다. 얀이는 욕을 쓸 때마다 벌금을 내는 교회 프로그램에서 벌금을 가장 적게 내는 아이에 속한다. 돈내기 싫어서 일부러 안 쓰는 거라도 상관없다. 써야 할 때와 쓰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안다는 말이니까. 레야도 친구와 게임할 때 살짝 들어보면 크게 욕을 섞지 않고 말한다. 가장 만만하고 가장 안전한 집에서 아이들은 욕을 쓴다. 새로운 욕도 써보고 수위도 조절한다. 나도 덩달아 적당히 솔선수범(?) 한다.

"엄마, 지금 욕 썼어요?"

"이 세상에서 너를 '베이비'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 그건 욕이 안 되는 거거든. 내 베이비를 베이비라고 하는데 뭐."

나라고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다시 아이를 낳기 전의 고상함과 품위를 회복하고 싶고 우리 아들들도 선하고 반듯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이가 진흙탕에 들어갔는데 엄마가 깨끗한 옷을 입고 밖에서만 나오라고 손짓하면 아이는 엄마에게 쉽게 달려가지 못한다. 엄마에 비해 자신이 너무 더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나를 내려놓고 같이 진흙 속에 들어가면 그 속에서 실컷 놀고 난 아이와 나란히 손 잡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정답이 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KakaoTalk_20250410_182429996.jpg 담임 선생님과 포옹하고 있는 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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