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이(고2)
"엄마, 교회에서 자전거 타고 집으로 오는데요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 근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좋은데 뭔가 좀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엄마 알죠? 좋은데 뭔가 안 좋은 거."
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햇살이 온화하기 그지없는 일요일 오후, 얀이가 집으로 오자 마자 소파에 앉으며 나에게 말했다. 누가 우리 아이의 봄에 쓸쓸함을 한 스푼 더했나? 알지, 그럼. 날씨 너무 좋아서 슬픈 거. 근데 엄마의 그날은 짝사랑의 서글픔 때문이었는데 너도 혹시...?
며칠 전 얀이 때문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교회에서 늦게 돌아온 아이가 팔찌 하나를 보여 주었는데 날짜가 적혀 있고 하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야?"
"날짜를 보세요."
"이거 너네 캄보디아 갔을 때네."
"그러니까요. 그때 커플이 몇 팀 생겼다 했잖아요. 그때 사귀게 된 누구와 누구가 헤어졌는데 그 여자애가 자기들 커플팔찌 이제 필요 없다고 저 줬어요." 캄보디아 선교 갔을 때라고 하면 불과 두세 달 전이다. 애들 연애야 오래가지 않더라 마는 역시나 그사이 벌써 헤어졌나 보다. 그건 그렇다 치고 걔네들 커플 팔찌를 왜 니가 들고 있니? 나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되어 얀이에게 재차 삼차 물었다.
"헤어졌으면 돌려주든지 버리든지 해야지 너를 왜 줘? 니가 쓰레기통이야? 그리고 준다고 그걸 받아와?"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그걸 전남친 친구인 얀이에게 주는 여자애도 이해가 안 갔고 그걸 준다고 거절 못하고 받아온 내 아이도 답답했다.
"그래서 받을 때 기분은 어땠는데?"
"아무 느낌 없었는데요."
"얀아, 이건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거야. '어쩌라고?'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고. 그 여자애 진짜 웃긴 애네." 옆에 있던 남편도 나도 이 어이없는 상황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 연애 무지랭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얀이도 예상치 못한 부모의 반응에 당황하면서도 욱하는 게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내가 알아서 해요." 아이가 화를 냈다. 저도 열받겠지. 순식간에 바보, 호구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확실히 사춘기의 절정을 지나서인지 아이의 화는 금세 가라앉았다. 예전 같으면 혈전 더하기 냉전 한 달짜리였을 거다. 나와 남편은 열과 성을 다해 남녀관계는 친구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특히 연인사이에는 절대로 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남편과 나는 별의별 말을 경쟁하듯 쏟아내었다. 딸 가진 부모는 세상의 남자가 다 늑대로 보이고 아들 가진 부모는 세상의 여자가 다 여우로 보이는 게 확실하다. 남편은 지금 당장 팔찌를 돌려주겠다는 문자를 보내라고 했고 얀이는 내일 말하고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오늘 밤 안에도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며 늦어도 오늘 안에 문자를 보내라고 했다. 역시나 아들이 설마 하는 동안 그 많은 일들은 일어났다. 그 밤에 헤어진 둘이서 화해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참 나. 아들은 알았을 것이다. 부모 말이 가끔은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일이 끝나는가 싶더니 또 다른 갈등이 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화해를 하고 다시 사귀기로 했는데 얼떨결에 중간에 끼었던 얀이와 또 다른 한 명이 그 과정에서 오해에 휩싸인 것이다. 얀이는 또 알았을 것이다. 남녀 사이에는 함부로 끼면 안 된다는 것과 부모 말이 생각보다 자주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일을 겪는 며칠 동안 얀이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연애를 넘어 결혼생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얀이도 궁금한 것들과 자신의 생각들을 이것저것 털어놨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했고 지금은 너를 먼저 알아가야 할 때라고 이야기했다. 결국은 대학 가서 연애하라는 이야기다.
“엄마, 사실 선교 갔을 때 커플들이 많이 생겼다고 했잖아요. 그때 저는 선교하러 왔으니 선교에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걔네들을 보니까 제가 왠지 진 것 같은 거예요. 나는 뭐 하나 싶고.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근데 이제 확실히 알았어요. 그 커플들 거의 헤어졌거든요. 그런 거 보니까 제가 맞는 거였어요. 에이, 진짜 선교는 더 빡쎘어야 했어요. 연애 같은 거 생각 못하게. 극한의 힘듦 속에 서로를 의지하는 동지애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걸 경험하고 왔어야 했어요. 이번 선교 너무 쉬워서 커플들이 막 생긴 거 같아요.” 아들아, 네가 아직 모르는 게 있는데 전쟁 속에서도 아이는 태어난단다. 재난 영화에서 마지막에 주로 키스신으로 끝나는 것을 모르니...
“얀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야. 너도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올 수 있어. 하지만 대학 가기 전까지 고백은 안 했으면 좋겠어.”
“왜요?”
“고백을 하게 되면 둘은 특별한 사이가 돼. 그럼 서로에게 의무와 책임이 생겨. 그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할 수 있을 때 누군가를 사귀는 게 맞다고 봐. 하지만 고백부터 해 버리면 진짜 네 감정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 그래서 애들이 잘 헤어지는 거야. 누군가의 마음을 아는 것보다 너의 마음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다 대학을 다른 곳에 가서 못 보게 되면요?”
“그땐 진짜 너의 진심이 드러나겠지. 쉽게 잊혀지면 그냥 스쳐가는 감정인 것이고 인연이 아닌 거야. 인연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어.”
“엄마, 내가 좋은 대학 갈 수 있는데 여자 친구 따라서 하향 지원하면 바보인 거죠? 대학 가서 바로 헤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바보 멍청이지. 말이라고?”
바야흐로 봄바람과 함께 아이의 인생에 ‘여자’라는 새로운 종족이 스며들어와 아이의 생각 속에 자라기 시작했다. 봄바람은 따스한 듯하면서도 속에 한 번씩 냉기를 품고 있다. 나는 어렴풋이 아들의 마음속에 천천히 스며드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 저는 눈이 낮은 것 같아요. 제가 호감을 느끼는 애들은 다 외모는 별로인 것 같아요.”
“네가 눈이 낮은 게 아니고 네 눈이 맞는 거지.” 누구냐? 그 외모보다 마음이 더 예쁜 애가? 어쨌든 아들아, 네가 사랑을 하게 된다면 얇은 냄비보다 뭉근한 가마솥 같은 연애를 해보길 엄마는 진심으로 바란단다.
며칠 후, 얀이가 놀이동산으로 현장학습을 갔다. 놀이동산 가면 꼭 바람 들어간 큰 망치나 하늘을 날고 있는 돌고래나 인형 따위를 사 오던 애가 이번에는 옷을 사 왔다. 옷, 맞다. 옷. 흰 반팔티에 아이보리색 바지를 쇼핑백에서 꺼냈다. 얀이가 처음으로 자기가 골라서 지 돈 주고 산 옷이다. 아이는 자기가 산 옷이 마음에 드는지 이렇게 입어보고 저렇게 입어보고 거울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진도 찍었다. 처음 보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 얼룩 묻으면 지우기 힘들다고 검은색 상하의로 옷장을 가득 채워 준 엄마가 너무 미안하구나... 더 이상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게 아이의 세계가 확장되고 있다. 자신만 있던 세계에 타인의 자리가 생기고 타인의 시선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의 변화가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그렇게 조금씩 부모의 자리도 줄어들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지 조그맣던 아이가 청년이 되어 내 품에서 날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좀 더 오래 붙잡는 대신 좀 더 많이 행복하게 지내다 가길 나는 또 다짐해 본다. 사춘기 때 아들의 뒤에 서기를 결심했다면 청년이 된 아들에게는 두어 걸음 더 뒤로 물러서야 할 것 같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이제 아이에게서 나도 독립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