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둘러보자 사람들이 유난히 몰려 있는 곳이 보였어. 그곳엔 참 비루하게도 차려입은 놈이 땅바닥에 엎드러져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짐을 던지고 있었어. 그냥도 아니고 아주 세게 던지는 사람도 있었어. 그래, 저놈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고 다녔으면 저런 취급을 받느냔 말이지. 나는 최대한 은밀히 사람들 틈에 섞여서 양심상 제일 작은 짐을 툭 던졌어. 눈치도 챌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짐. 내 등에도 그 짐이 톡 얹히는 것 같기는 한데 뭐 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어. 용기를 얻은 나는 좀 더 큰 짐을 던져보기로 했어. 조금 묵직한 짐을 골라 휙 던지고 돌아서는데 그 짐 안에 뭐가 들었는지 '쨍그랑'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어. 놀라서 돌아보니 하필 그 사람의 이마에 짐이 떨어지며 깨진 거였어. 아뿔싸! 실수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어. 아니, 뭐 나만 던졌나? 당신들도 던졌잖아요. 당황해서 아니라고 두 손을 젓고 있는데 그 사람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어. 헉, 이마에서 난 피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어. 하지만 그 피보다 더 놀란 것은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었어. 짧은 순간 원망과 증오, 복수의 눈빛을 예상했던 나는 그가 나를 찾아내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 숨으려고 했어. 하지만 내 발은 묵직한 철근을 매단 듯 꼼짝하지 않았고 나는 결국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어. 숨이 멎는 듯했지. 그 눈빛... 아, 그 눈빛은 내가 예상한 눈빛이 아니었어. 그는 나를 분노 대신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았어. 아니, 지금 누가 누굴 불쌍하게 보는 거야.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이내 애잔함으로 변했어. 찰나에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했지.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어. 벗어나야 해, 벗어나야 해, 끝없이 소리치면서도 나는 조금 더 그 눈빛에 머물고 싶었어.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말이지 나는 내 짐이 사라지고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이 붕 떠오를 듯한 느낌을 받았어. 하지만 그 황홀한 시간은 짧게 끝났고 곧바로 나를 휘감은 것은 부끄러움이었어. 분명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만 나는 그의 앞에서 혼자 벌거벗고 서 있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어. 놀란 나는 누군가의 뒤에 숨었어. 그러자 사라졌던 짐도 쿵 하며 다시 등 뒤로 내려앉았지.
나는 도망을 쳤어.
왜 도망을 쳤는지는 나도 몰라. 그냥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어.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었어. 어디로든 멀리 떠나서 오늘 일이 없었던 듯이 어제처럼 지내고 싶었어. 어제처럼? 어제는 행복했나? 어제는 이 짐덩이가 없었나? 이 빌어먹을 짐...
지구 끝까지 달려갈 기세였지만 사실은 얼마 가지 못해 나는 그대로 쓰러졌어. 평소보다 짐이 더 무겁게 느껴졌거든.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짐은 더 무거워졌어. 원래 이렇게 무거웠었나?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까지 무거웠었나?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졌어.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다가 정말 이러다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몰려오더라. 그러다 아까 그 눈빛이 생각났어. 사실은 달리는 내내 그 눈빛이 떠올랐었지. 내 짐이 사라지고 내가 잠시 공중에 떠 있는 듯 가벼웠던 그 순간을 떠올렸어.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그때를 느낄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지.
나는 가까운 바위에 주저앉았어.
나는 지금 누구를 피해 어디로 도망가고 있는 걸까? 세상 끝까지 간들 그 순간이 잊혀질까? 바위를 따라 비스듬히 고꾸라졌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어. 지나온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지. 고통, 기대, 절망, 분노, 슬픔의 시간들이 눈앞에 펼쳐졌어. 이상하게도 나에게 짐을 던진 사람들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짐을 던진 사람들의 얼굴은 생생하게 떠올랐어. 슬프게 흐느끼던 친구의 모습도.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어. 후회였지. 내 짐을 더 얹는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왜 멈출 수가 없었을까. 왜 그랬을까. 왜? 왜?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나...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 잠인지 죽음인지 분간하기도 어렵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깊은 잠.
얼마나 지났을까?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에 잠이 깼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어. 밤인가? 따뜻하더라. 포근했어. 눈을 뜨면 꿈처럼 사라질까 두려웠지만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어.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누군가의 등이 보였어. 흰색 옷을 입은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 돌아앉아 분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어.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이 생선을 굽고 있는 것 같기도 했어. 냄새를 맡으니 미칠 듯이 배가 고프더라. 모닥불이 그의 옷에 비쳐 따뜻한 오렌지빛으로 어른거리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어. 나는 주위를 살피며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빠르게 더듬어 갔어. 밤이 깊어진 이곳에는 오직 그와 나만 있었고 나는 내가 쓰러진 그곳에 그대로 누워 있었어.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짐이 사라진 것을 알았어. 짐이 사라졌다! 짐이 사라졌다고! 나는 눈을 한 번 더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어. 그 순간 그가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어. 희고 깨끗한 옷을 입었음에도 그가 채 몸을 다 돌리기 전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어. 사라진 짐과 그 이마에 난 상처! 나는 그를 만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