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이달꿈

고독씨와 꿈의 여왕(3)

by 최여름

"호오, 이번에는 여자집에 다녀오셨다고?"

꿈의 여왕은 묘한 표정과 기분 나쁜 미소로 빈정대었어요.

"짝사랑하는 여인이 궁금하셨나 보네요. 참나, 남자들 속이란 다 어휴. 그래, 여자로 살아보니 좋았어요? 간 김에 본인한테 고백이라도 하게 하시지요, 왜?"

꿈의 여왕은 계속 몰아세웠지만 고독씨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나 때문인 것 같소. 그 여자를 그렇게 만든 게."

"뭐야, 진짜 뭔 일 저지르고 온 거예요?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위험한 분이시네. 남일에 전혀 관심 없어 보이더니."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녀를 그렇게 봤다고요. 말을 안 한다고 들리지 않는 게 아니었어요.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나는 그렇게 쳐다봤어요. 누가 나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면서 내가 그러고 있었다고. 내가 제일 비겁하고 못난 사람이었어요."

꿈의 여왕은 그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스크루지야, 뭐야. 왜 회개하고 난리야. 여기가 무슨 개과천선 프로그램이라도 돼?'

"그런 말은 속으로 좀 하시지요?"

"어머, 들렸어요?"

"아니,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길래. 놀라는 걸 보니 맞나 보네."

"진짜 내가 험악한 애들 풉니다, 예? 나를 지금 뭘로 보고."

"뭘로 보긴 뭘로 봐요, 자주 보니 친구 같구먼. 성격 급하고 독선적이고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게 꼭 나랑 닮았어. 그쪽도 외로우면 나랑 친구나 합시다."

"이봐요. 난 여기 여왕이고 친구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나는 당신이 빨리 자기 자리 찾아가서 다시 이런 귀찮은 일에 휩쓸리지 않고 조용히 평화를 누리고 싶다고요."

"하하. 농담 안 통하는 것도 나랑 똑같네. 알았어요. 이젠 나도 빨리 나에게 돌아가고 싶어요. 어떻게 된 게 다들 피곤한 인생들 뿐이야. 인기 많은 것도 예쁜 것도 다 소용이 없는 거였어요. 헛것이었다니까."

"인생 강론 필요 없고 이번에는 진짜로 제자리 찾아가는 거예요. 알겠죠? 다음에 또 이곳에 올 때는 커다란 리본이라도 자기 문에 걸어놔요. 다시 돌아가는 길 잃어버리지 않게."

"다시 올 때 나 안 반겨줄 거요? 나 또 혼자 있다가 가라고? 낮에도 외로운데 꿈에서도 외로우라고?"

"친구를 만들어 보시든가, 아님 친구가 되어 주시든가. 남들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자기 문은 자기가 열어야지. 안 그래요?"

"맞습니다, 여왕님. 인제 뭐 어디서 저를 떨어뜨리시겠습니까? 혹시 화산구덩이는 아니죠?"

"옵션은 다양하죠. 가시밭, 악어떼가 우글거리는 늪, 지옥의 불길. 뭘 원하세요?"

'암튼 독한 여자야.'

"그런 건 속으로 좀 하시지요?"

그 순간 고독씨의 몸은 다시 하늘로 높이 높이 날아올랐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포근한 구름 위로 사뿐히 떨어졌어요.

"온유야, 온유야"

누군가 고독씨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어요. 고독씨는 좀 더 포근한 구름 속에 머물고 싶었지만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가만있어 봐. 온유? 온유? 온유가 누구였더라? 에이, 어쨌든 이번에도 잘못 들어왔네.'

고독씨는 거울을 찾아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어요. 까무잡잡한 소년이 거울 속에 있었어요. 누구였지? 분명히 본 얼굴인데 쉽게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소년을 깨운 할머니가 등이 굽은 채로 양철밥상을 그의 앞에 가져다 놓았어요. 한 눈에도 나이가 많고 몸이 매우 불편해 보이는 노파였어요.

"할머니, 아침은 제가 차린다니까 왜 또 하셨어요? 몸도 안 좋으신데. 늦잠 자면 깨우라니까."

'오호, 이번엔 꽤 착한 녀석이군.'

고독씨는 어린 친구의 정감 어린 말투가 마음에 들었어요.

"너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내 소원인데 어떻게 깨워. 하루 종일 구두 닦고 밤에는 식당에서 일하고."

'구두? 식당? 혹시 사거리에 구두 닦는 그 녀석인가?'

고독씨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어요.

'그 녀석이라면 한쪽 다리가 불편한 그….'

고독씨는 두 다리를 만져 보았어요. 역시 왼쪽 다리에 딱딱한 의족 같은 게 만져졌어요.

"왜, 또 다리 아파?"

"아니에요, 할머니. 그냥 습관적으로 만진 거야. 괜찮아요."

"내가 네 다리만 보면 마음이 아파서…. 차라리 내 다리를 저렇게 만들고 너는 마음껏 달리게 해 주시지."

순간 온유의 머릿속에 어릴 적 사고 현장이 스쳐갔어요. 아빠는 온유가 기억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엄마는 온유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난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셨어요. 온유는 목숨은 건졌지만 왼쪽 다리를 잃었어요. 그날은 온유가 전국소년체전 육상대회에 가는 길이었어요. 고독씨는 숨이 턱 막혀 왔어요.

'아니 왜 이런데로 왔어? 하루 종일 마음 아플 일만 있겠군. 불쌍한 녀석.'

"할머니, 그 얘긴 그만하라니까요. 엄마가 병원에서 뭐라 그랬어요? 나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잖아요.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에서 만나자고 했잖…."

고독씨가 울컥해 버리는 바람에 온유도 따라 눈물이 맺혔다.

"암튼 할머니. 나는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엄마 아빠 만날 거예요. 엄마랑 그러기로 약속했어."

"그래, 그래. 이 할미한테 너라도 남겨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너 때문에 내가 살지. 암. 내 목숨도 같이 살리신 거지."

"할머니, 이제 나 나가야 돼요. 내가 빨리 안 나가면 사람들이 더러운 구두 하루 종일 신고 다녀야 돼."

어린 가장은 그렇게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집을 나섰어요. 보조 지팡이까지 다리가 3개가 되었어요. 한참을 걸어서 사거리에 이르자 온몸에 땀이 흘렀어요. 열심히 걸었지만 남들보다 속도는 느리고 힘은 더 들었어요. 구두 닦는 곳은 사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옆에 더부살이처럼 붙어 있는 가건물이었어요. 온유는 한 평도 되지 않는 그 좁은 곳에서 온종일 손님들의 구두를 닦았어요. 구두만 쳐다보느라 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가 없었지요. 때문에 고독씨는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하루를 보냈어요. 구두 손님이 사라진 저녁에는 어느 작은 식당에 가서 직원용 저녁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웠어요. 김치와 몇 가지 나물이 전부였지만 아침 식사 이후 처음 먹는 식사여서 남김없이 전부 먹었어요. 그런 다음 소년은 식당이 문을 닫을 때까지 주방에서 설거지를 했어요. 온유의 하루는 온통 불편함과 힘겨움으로 채워졌고 이 하루가 내일도, 그다음 날도 매일 똑같이 이어질 것 같았어요. 그러나 고독씨는 지금껏 자신이 느껴 보지 못한 평화와 행복을 느꼈어요. 이해할 수가 없었죠. 가장 힘든 하루였는데 가장 행복하다니. 온유에게도 하루 동안 수많은 불안과 걱정, 서글픔 같은 감정들이 스쳐 갔어요. 손님들의 무시와 무례함에 참을 수 없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온유는 화를 내는 대신 노래를 불렀어요.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멜로디는 단순하면서도 편안했고 '감사'라는 말이 자주 나왔어요. 하루 종일 온유가 가장 많이 한 말도 '감사합니다' 였어요. 그는 어떤 손님을 만나도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어요. 고독씨는 습관적으로 내뱉는 그 말이 절름발이 구두닦이 소년을 더 만만하게 보이게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때로 사람들은 그 '감사'를 악용한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어요. 감사는 사람의 상대적 위치를 구분 짓는 말이며 감사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관용이라도 베풀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고 생각했어요. 구두 하나 닦으면서 온갖 거드름을 피우던 저 양아치 같은 놈들만 봐도 알 수 있었죠. 하나같이 다 높은 자에게 굽실대던 낮은 존재감을 이 작은 소년 앞에서 보상받으려는 듯이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고독씨의 세상은 자신을 낮추면 더 밟고 지나가는 곳이었어요. 나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있으면 시기하여 끌어내리려고 하고 나보다 낮은 곳에 있으면 위로 못 올라오게 무시하고 견제했죠. 그 교묘하고 복잡한 관계에 엮이지 않으려 그는 고독을 선택했고 행복하지는 않아도 불행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온유는 달랐어요. 낮은 곳에서 무시받는 삶이라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고 하늘을 쳐다보지 못해도 가슴속에 늘 천국이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하루 종일 때가 찌든 슬리퍼를 신고 있어도 명품 구두를 신고 잔뜩 찌푸린 사람들 보다 훨씬 더 귀한 사람처럼 보였어요. 고독씨는 하루 종일 좁은 공간에서 구두를 닦으며 사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어요. 그중에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땅만 보며 걷고 있는 고독씨의 모습도 있었죠.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마음을 꽁꽁 싸매고 출근을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을 하고 있었어요. 진짜 고독씨가 구두라도 닦으러 왔다면 '이 사람아, 웃으면 누가 잡아가나? 당신이 제일 불쌍해 보여.'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고독씨는 구두를 닦는 일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금방 또 더러워질 거 닦아서 뭐 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여서 뭐 해?' 늘 그런 식으로 거만함과 무관심을 자신의 무기로 삼는 그런 부류였지요.


"뭐예요, 그 표정은? 이번엔 진짜 좋은 곳에 다녀오셨나 봐? 어디 갑부집이라도 기다리고 있던가요?"

고독씨는 자신의 표정이 무척 밝아졌음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어요.

"아니, 하루 종일 두 끼 밖에 못 먹고 진탕 고생하다 왔죠."

"그런 사람 표정이 그래요?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를 말해 봐요."

"진짜? 진짜를 말하라고? 진짜는 구두닦이한테 배워야 하는 거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빛나는 일을 하는 진짜 인생."

"괜찮은 친구라도 만나셨나 봐요?"

"친구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친구지. 난 그의 발끝도 못 따라가요."

"친구는 혼자서 해요? 난 친구 필요 없다니까."

"친구가 별 거 있나? 속마음 읽을 수 있으면 그게 친구지."

"이 양반이 점점 선을 넘으시네. 난 이곳의 여왕이라니까요."

"여왕이면 뭐 외롭지 않나? 여왕이면 뭐 친구 필요 없나?"

"됐고, 당신이 내려가 있는 동안 당신 집으로 가는 문을 찾았어요. 또 문을 못 찾는 척할까 봐 내가 직접 큰 리본을 달아놨으니까 다시 이 꿈속에서 헤매지 말고 당신의 실제 삶으로 돌아가요. 다른 사람의 인생 그만 탐내시고."

"다른 사람이랑 저울질한 거 아니라니까 참. 나도 내 인생 누구보다 소중해요. 소중해졌어. 다른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고."

"네, 네. 알겠으니까 어서 돌아가요. 조금 더 늦으면 지각이에요."

"이것 참. 헤어지려니 서운하구먼."

"아쉬우면 걔네들 한번 인사시켜 드려요?"

"농담도 안 통하고 진담도 안 통하고. 알았어요, 알았어. 진짜 갈게요. 가고 나서 울지 말고."

"끝까지 저러시네. 아, 그리고 제가 기념으로 선물 하나 드렸어요. 가서 확인해 보세요."

"설마 그 놈들을 내 방에다 풀어놓은 것은 아니죠?"

"그럴 수도 있죠.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으니까."

고독씨는 어울리지 않게 분홍색 큰 리본이 달린 그의 문을 열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어요. 다행히 여왕이 말했던 사나운 놈들은 따라오지 않은 것 같았어요. 대신 그의 앞에는 먼지가 잔뜩 묻은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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