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럴 수도 있죠. 그러게 누가 꿈속에서 길을 잃으래?"
고독씨는 꿈의 여왕의 뻔뻔한 태도에 기가 찼어요.
"여기 왕이라면서요? 왕이 뭐 그래? 할 줄 아는 건 쫓아내고 협박하는 것뿐이죠?"
고독씨는 그렇게 말해놓고도 여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신호등처럼 깜빡이는 것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어요. 당장이라도 무서운 놈들을 풀어서 밤새 꿈속을 쫓겨 다니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랫동안 관리자용 문을 사용한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요즘 누가 꿈속에서 길을 잃어요? 꿈꿀 새도 없이 후딱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암튼 미안하게 됐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문을 찾아봐요."
꿈의 여왕은 간신히 화를 누르며 고독씨를 다독였어요. 하루라도 빨리 보내고 쉬고 싶었거든요. 고독씨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어요.
"사실 내가 오자마자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봤는데 도저히 문을 찾을 수가 없어요.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으로 통하는 문이고 내 문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이제 어떻게 하죠?"
고독씨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꿈의 여왕을 바라봤어요.
"혹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요?"
"..."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꿈의 여왕은 다시 말했어요.
"돌아갈 생각은 있는 거냐고요. 당신의 세계로. 내일 대답 들을까요?"
"그, 어차피 문을 못 찾은 김에 한 번만 더 다른 사람 문으로 들어갔다 와도 될까요?"
"되겠어요, 그게?"
꿈의 여왕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그럼 할 수 없죠. 제 문을 찾을 때까지 여기 계속 머무르는 수밖에. 무서운 애들 풀어놓으시면 소리 지르면서 운동 좀 하면 되고."
꿈의 여왕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고독씨를 바라보았어요.
"저 문을 사용 안 한 지 오래되긴 했지만 엉뚱한 곳으로 막 보내고 그런 문이 아니거든요? 혹시 문 통과할 때 딴생각 품은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 인생 부러워하거나."
"내가요? 촐랑씨를요? 허 참. 저 사람처럼은 되지 않아야겠다 생각했다면 몰라도."
"암튼 다른 사람 인생과 자기 인생을 저울질 한 건 맞는 거네. 그런 불순한 생각을 품으니까 벌 받은 거지."
"아니라니까요! 고층 꼭대기에서 떨어지면서 생각은 무슨 생각을 해요? 죽는 줄 알았구먼."
"좋아요, 그럼. 이번에도 데려다줄 테니까 자기 집으로 들어가든 남의 집으로 들어가든 테스트 한번 해봐요. 자기 집으로 들어가면 더욱 좋고."
고독씨는 꿈의 여왕을 따라 다시 하늘을 날아 이번에는 바다 한가운데 공중에 매달렸어요. 하늘에서 이어진 밧줄 같은 것이 고독씨의 허리에 묶여 있었어요.
"뭐, 뭐, 뭐예요? 지난번과 다르잖아!"
"같은 거면 재미없잖아요."
"내려 줘요. 무서워."
"원하신다면!"
그 순간 거대한 가위가 하늘과 고독씨 사이에 있던 끈을 싹둑 잘랐어요. 그는 비명과 함께 깊은 물속으로 풍덩 빠졌어요. 고독씨가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새벽이 오지 않은 한밤중이었어요. 고독씨의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어요.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낯선 방이었어요. 고독씨는 바다로 빠질 때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떠올려 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어요.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죽는다는 생각 말고 무슨 생각이 들었겠어요?
"그 문이 엉터리면서 뒤집어 씌우기는. 근데 여기는 어디야? 난 또 누구야?"
고독씨는 벽을 더듬어 불을 켰어요.
'헉!'
고독씨가 깨어난 곳은 작은 싱크대와 세탁기, 올망졸망한 가전제품들이 한 공간에 있는 원룸이었어요. 게다가 벽에 걸린 원피스며 화장대에 가득 놓인 화장품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인형들까지 분명 여기는 여자방이었어요. 고독씨는 침대 옆 화장대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어요.
"누구야, 이 사람이?"
어디서 많이 본 듯했지만 도저히 누군지 알 수 없는 얼굴이 나타났어요.
"설마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떠올렸을까, 그 문이 이상해. 그 여왕이라는 여자는 더 이상해. 일부러 날 골탕 먹이는 건가?"
고독씨는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가 어색해 계속 '아, 아' 목소리를 가다듬어 보았어요. 분명 이 목소리도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어요. 여자방에 들어온 것이 처음인 고독씨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어요.
"무슨 화장품이 저리 많아? 여자들은 참 피곤하게도 사는군."
그 순간 고독씨는 배가 무척 고파왔어요. 아무래도 배고파서 밤중에 깬 것 같았어요.
"이 여자는 저녁도 안 먹고 잤나? 왜 이렇게 배고픈 거야?"
고독씨는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어요. 냉장실에는 온통 샐러드와 닭가슴살 뿐이었어요. 실망한 그는 냉동실을 열었어요. 먹다 남은 것으로 보이는 치킨과 피자가 꽁꽁 얼어 있었어요.
"그럼 그렇지. 저런 것들만 먹고 어떻게 살아?"
고독씨는 치킨과 피자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리기 시작했어요. 까탈스러운 성격만큼이나 미식가이자 소식가로 알려진 고독씨가 평소 잘 먹지 않는 음식들이었지만 배가 고파서 그런지 천상의 맛처럼 느껴졌어요. 꽤 많은 양의 음식들을 먹고 나니 배가 부른 것도 잠시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고독씨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고개를 처박고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넣어 먹은 음식들을 다 게워내었어요.
'뭐야, 왜 이러는 거야? 이럴 거면 왜 먹었... 우웩!'
한참을 토해내자 더 이상 나오는 음식물은 없었지만 속은 계속 일렁였고 힘겨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어요. 체한 것도 아닌데 분명 일부러 토한 것이었어요.
'미쳤구나. 칼로리가 얼만데 그걸 다 먹었어? 다시 꽃돼지가 되고 싶은 거야?'
여자의 생각이 고독씨의 생각과 스테레오로 울려왔어요.
'독하게 다이어트하는 여자였군. 별로 뚱뚱하지도 않은데 암튼 여자들은 알 수가 없다니까.'
아침이 되어 고독씨는 자신이 화장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어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야무지게 말아 올리고 얼굴에 뭔가를 잔뜩 바르고 또 발랐어요. 어느새 얼굴이 잡티하나 없이 뽀얗게 되자 이번에는 각종 펜으로 얼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속눈썹도 붙이고 아이라인도 능숙하게 그렸어요. 마지막으로 립스틱까지 바르고 나자 고독씨는 또 한 번 깜짝 놀랐어요. '예쁨씨다!' 그녀는 예쁨씨였어요. 고독씨를 볼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짓던 그 예쁜 예쁨씨 말이죠. 고독씨는 슬픔이 몰려왔어요. 24시간이 모두 예쁠 것 같던 예쁨씨의 맨얼굴을 봐서가 아니었어요.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도 반으로 잘라 예쁘게 오물거리던 예쁨씨가 게걸스럽게 먹고 우악스럽게 토해내던 그 모습을 봐서도 아니었어요. 이 슬픔의 정체는 예쁨씨의 것이었어요. 뚱뚱해서 꽃돼지라 놀림받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화장품과 옷을 사느라 갚지 못한 카드빚에 대한 걱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예쁨씨의 머리를 스쳐갔어요. 예쁨씨에게는 슬픔과 걱정이 하루 종일 붙어 다녔어요. 그럼에도 예쁨씨는 모든 사람을 향해 밝게 웃었어요. 사람들은 예쁨씨의 마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오늘도 예쁨씨의 외모에 대한 칭찬만 늘어놓았어요. 알량한 수작을 거는 놈들도 몇몇 있었지만 예쁨씨는 단호하게 화를 내지도 못했어요. 예쁨씨는 하루 종일 높은 하이힐 위에서 꽃처럼 웃었고 틈날 때마다 몰래 거울을 쳐다보았어요. 단 한 사람만 예쁨씨를 보고도 웃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고독씨였어요.
'좀 웃어라, 이 놈아. 너도 예쁨씨 좋아하잖아. 저 가식적인 놈. 저렇게 인상 쓰고 있으면 자신이 강해 보이는 줄 아는 머저리!'
만약 예쁨씨가 자신 안에 있다면 진짜 속마음을 들켰을 거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웠어요. 그래도 예쁨씨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고독씨가 떨떠름한 얼굴로 지나가자 예쁨씨는 다시 후다닥 거울을 찾았어요.
'왜 또 저런 눈빛으로 나를 보시지? 내가 그렇게 못생겼나? 살이 더 쪘나? 어제 먹고 토해서 다크서클이 더 짙어진 것 같아. 어떡해.'
고독씨는 예쁨씨의 마음이 하루 종일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을 느꼈어요. 그녀의 마음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따라 하늘 높이 솟았다가 땅으로 처박기를 계속했어요. 특히 오늘 고독씨가 잔뜩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눈빛이 하루 종일 그녀를 따라다녔어요. 고독씨는 예쁨씨가 가여웠어요. 꽃돼지라고 놀리던 놈들부터 잡아와 그녀 앞에 사과하라고 무릎 꿇리고 싶었어요. 음흉한 눈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 내리던 놈들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어요. 예쁨씨는 사람들의 다양하고 오랜 폭력에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