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verbs 4:23
포그씨는 출근길에 비를 맞았다. 외투 단추가 떨어져 급하게 수선하느라 날씨를 확인하지 못했다. 차는 정비소에 있었고 늘 귀찮게 들고 다니던 미니 우산은 이틀 전부터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비.가.오.지. 않.을. 줄. 알았다.
버스를 탈 때까지도 아무 일이 없었다. 버스는 갑자기 쏟아진 폭우 속에 포그씨를 뱉어 놓고 사라졌다.
“모든 것이 마치 짠 듯하군.”
포그씨는 되려 비를 조롱하듯 피하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회사에 도착하자 친절한 제시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제 옷이라도 드릴까요?”
“그 옷이 제게 맞을까요? 암튼 고마워요.”
포그씨는 친절한 제시에게 하마터면 짜증을 낼 뻔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 옷을 주겠다는 건가. 포그씨는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면 옷은 금방 마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계절은 여름의 초입에 있었고 비 그치면 어제처럼 기온이 오를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몇 시간만 지나면 점심시간이고 그때 근처 옷가게에서 아무 옷이나 사서 입으면 별일 아닌 것처럼 지나갈 것이다. 탕비실에 있던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갑자기 내린 비에도 아무도 비를 맞고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비는 점심시간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옷가게도 휴무였다. 괜히 옷가게까지 갔다 오느라 점심시간도 다 날려 버렸다. 그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상황은 누구 잘못인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온몸이 축축함에 찌든 채 하루를 보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고 젖은 옷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여러 번 한기를 느꼈다. 포그씨의 동료들은 처음에만 몇 마디 건넨 뒤 이내 젖은 포그씨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시처럼 영혼 없는 친절을 남발하는 사람도 더는 없었다. 포그씨는 젖은 옷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최소한의 사람과만 이야기를 나누었고 집중력이 필요한 일들은 뒤로 미루었다. 그렇게 집에 갈 시간만 기다리며 하루를 버텼다.
“포그씨, 큰일 났어요. 거래처에 보낸 물건에 오류가 있었나 봐요. 급하게 포그씨를 찾는데 어쩌죠?”
포그씨는 집으로 가는 버스 대신 사고 처리를 위해 지방행 기차 안에 있었다. 비는 여전히 굵었다 가늘었다를 반복하며 세상을 다 적실 때까지 그치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비를 피하지 못한 사람은 포그씨 밖에 없어 보였다. 포그씨의 옷은 이제 겉에서 봐서는 젖은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옷의 습기가 포그씨 안으로 모두 스며들었는지 포그씨는 여전히 축축하고 추웠다. 기차 안에서 포그씨는 사고에 대한 대책을 생각하느라 잠시 자신이 젖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 비를 맞은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잊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다시 젖은 옷이 느껴졌다.
“젠장, 지랄 같은 하루구만!”
그는 밤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비로소 참았던 말을 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옷을 만져 보지 않는 이상 옷이 젖었다는 것을 눈치챌 사람도 없었다. 옷이 말라 갈수록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꿉꿉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젖은 신발 속에서 퉁퉁 불어 있는 발가락들은 시궁창에서 꼼지락거리는 것 같이 불쾌했다.
거래처에 도착한 그는 잔뜩 열이 오른 사장과 말리는 척하며 더 신경을 건드리는 그의 와이프에게 영혼이 너덜거릴 정도로 항의를 받았다. 딱 한 번 주문 물건과 배송지를 확인하지 않은 채 인턴에게 넘긴 게 화근이었다. 사장은 포그씨가 버튼을 잘못 눌러 세상을 멸망시키기라도 한 듯 온몸으로 화를 뿜어 댔다. 그러다 제풀에 지쳤는지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나도 소싯적엔 실수하면서 자랐다.’는 말로 갑자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훈계. 포그씨는 악질의 죄인이었다가 이제는 세상에 처음 발 디딘 어설픈 애송이가 되어야 했다. 한참을 어른 흉내 내던 사장은 선심 쓰듯 술 한 잔 하자고 제안했고 포그씨는 하루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만취한 사장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포그씨도 비틀거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깨어나 보니 그는 소파에 누워 있고 침대에는 이혼한 전처가 자고 있었다. 포그씨는 최선을 다해 지난밤을 떠올렸다. 어젯밤 술기운에도 그는 이곳이 전부인 캐넌이 살고 있는 지역임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캐넌의 뒤를 따라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도로에서 기억은 끊어졌다.
‘미쳤군. 아주 제대로 미쳤어.’
포그씨는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물소리로 캐넌을 깨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최악을 마주하기 전에 떠나야 했다. 포그씨는 조용히 가방을 챙겨 집을 나왔다.
‘딸깍’
누구라도 깰 것 같이 크게 문소리가 났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도둑처럼 그는 그곳을 빠져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는 어젯밤 세 번이나 캐넌에게 전화한 것을 확인했다. 첫 번째는 부재중이었고 두 번째는 10초, 세 번째는 5분의 통화기록이 있었다. 포그씨는 머리를 뜯으며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했다. 캐넌에게 문자라도 남겨야 하는지 고민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포그씨의 옷은 이미 말라 있었지만 포그씨는 다시 오한이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출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 전화를 했다. 그는 상사인 교활한 제임스에게 지방 출장 건은 잘 해결되었다고 간단하게 알린 뒤 오늘 하루 연차를 쓰고 싶다고 했다. 제임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오늘 출고될 물건에 사인만 하고 가라고 했다. 포그씨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간밤에 제대로 씻지 못해 집에 들렀다가 출근하겠다고 했더니 제임스는 사인만 하고 집에 가서 푹 쉬라고 했다. 포그씨는 할 수 없이 그대로 회사에 출근했다. 이미 출근 시간을 훌쩍 지나 로비는 한산했다. 포그씨를 눈여겨보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포그씨는 고개를 숙인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머, 포그씨. 오늘 쉬는 거 아니었어요?”
하필 친절한 제시다. 양손에 커피 캐리어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단체로 티타임인가?
“아니, 제임스가 포그씨 오늘 쉰다고 하셔서요.”
“급하게 사인할 게 있어서요.”
“그럼, 오신 김에 잠깐 회의 참석하시면 안 돼요? 신입들이 주관해서 하는 사내 굿즈 디자인 시안이 나왔는데 도저히 뭘 고를지 몰라서요. 포그씨는 그런 데 센스가 있으시니까요.”
이 아가씨야, 지금 내 몰골이 기념 컵이나 고를 상태로 보이세요? 그대는 왜 그런 센스마저 없으신가요? 포그씨는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듯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시에게 말했다.
“1번이요.”
“네?”
“1번 디자인으로 하시라고요. 못 고른다는 것은 다 비슷하다는 말일 테고 그럼 디자이너가 1번으로 내민 디자인으로 하면 서로가 좋을 거예요.”
“아이, 그래도. 시간 많이 안 뺐을 테니 한 번만 봐주세요, 네?”
바짝 다가온 제시가 갑자기 코를 찡그렸다.
“포그씨, 혹시 이 옷 어제 그 옷이에요? 비 쫄딱 맞은 옷?”
“그렇게 됐어요.”
포그씨가 대답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제시는 커피를 높이 흔들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작은 박수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포그씨는 제시가 사람들의 시선을 가져간 틈을 타 조용히 자기 자리로 갔다.
‘도착하는 즉시 사장실로 올 것!’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그는 출고 서류를 빠르게 확인하여 사인한 뒤 제임스의 책상에 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머리는 기름이라도 부은 듯 반질반질하게 착 가라앉아 있었고 턱에는 수염이 거뭇거뭇했다.
‘누구라도 나 오늘 연차라고 말 좀 해주지. 제시도 다 알고 있더구먼.’
대충 머리와 옷매무새만 다듬고 그는 사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