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이달꿈

포그씨와 비(2)

by 최여름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던 비서가 포그씨를 보고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사장님이 보자고 하셔서요.”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긴장한 탓에 반쯤 그려진 비서의 입술을 보고도 웃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사장실로 들어가려던 포그씨가 몸을 돌려 비서에게 물었다.

“저 혹시 무슨 일로 절 찾으시는지?”

포그씨는 1퍼센트라도 피고용인으로서의 동질감이 비서에게 있길 기대하며 물었다.

“직접 들으시면 됩니다.”

그걸 몰라서 묻나요? 상대가 나에게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만 알려 달라는 것 아니요. 혹시 어제 그 일로?

“들어가시죠.”

포그씨가 들어가자마자 급하게 문이 닫혔다. 남은 입술을 마저 그리겠지? 사장실에는 사장인 완벽한 클라라와 교활한 제임스가 함께 앉아 있었다. 제임스를 보고 포그씨는 더욱 긴장을 했다. 연차를 희망한 것을 알고도 사장과 함께 나를 부른 거면 급하거나, 매우 중요하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어, 앉게.”

제임스가 이 방의 주인인 듯 포그씨에게 명령했다. 포그씨는 앉으면서 클라라의 표정을 살폈다.

“어제 지방에 내려갔었다고요? 고생 많았겠네요.”

클라라는 친절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닙니다. 다 저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서요. 잘못 배송된 물건은 회수하고 새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재고가 있어서 영업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럼요. 우리를 믿고 거래하는 분들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되지요.”

포그씨는 자신의 실수로 인한 일이라 어젯밤의 일들을 가능한 한 줄여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본인조차 그 일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잠시 허탈했다. 어제의 그 고생이 별 거 아니었다니. 욕을 먹고 술자리까지 시중든 것은 별일 아니었다고 치자. 그래도 전처의 집에서 일어난 것은 별일이 아닐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사장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냥 묻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는 하룻밤이었다. 포그씨는 사장이 어제 그 일로 자신을 부른 것은 아님을 알았다. 그럼 뭐지? 아무것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포그씨가 우리 회사에서 여러모로 애쓰고 또 중요한 역할들을 해주고 있는 것 알아요. 다른 직원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맞습니다. 미스터 포그만한 인재는 찾아보기 힘들지요.”

제임스가 클라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포그씨는 뭔지 몰라도 둘이 한패로 움직이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장님이 자네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려 하는데 어떤가?”

포그씨는 아까부터 자신이 사장인 것처럼 끼어드는 제임스가 거슬렸다. 지금도 몸이 클라라 쪽으로 쏠려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을?”

포그씨는 도저히 가늠이 안 되었다. 어제, 오늘 통틀어 제일 불안한 순간이었다. 클라라가 몸을 포그씨 쪽으로 당기며 말을 했다. 포그씨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클라라는 포그씨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고도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임스의 표정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음. 이번에 회사가 신입들을 대거 뽑은 거 아시죠? 그런데 신입들이 다 젊은 세대여서 그런가 영 회사와 조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아요. MZ? 뭐 요새 그렇게 부른다던데. 좋아요, 뭐. 똑 부러지고 자기 의견 확실하고. 한데 회사는 팀 체계거든요. 한 팀이 마음을 맞춰서 의견을 조율해 가면서 하나로 움직여가야 하는데 전체적으로 신입이 있는 팀들에서 불만이 많이 터져 나와요. 다들 자기주장만 하느라고 의견이 모아지지가 않는다는 거지.”

“맞습니다. 어찌나 니 업무, 내 업무 칼같이 자르는지 복사 한 장도 부탁하기 힘들다니까요.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퇴근시간 됐다고 상사보다 일찍 집에 가질 않나, 집에 가서는 전화도 씹는 아, 아니 전화도 안 받아요. 그리고 다음 날 와서 왜 전화했는지 묻는다니까요. 궁금하면 그냥 전화를 받지.”

제임스는 단단히 벼른 듯 침을 튀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유치하기는, 저러니 꼰대 소리를 듣는 거지. 마치 초등학생이 담임에게 친구들 하나하나 고자질하는 것 같았다. 근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 거지? 점점 언성이 높아지던 제임스를 클라라는 팔을 잡는 시늉을 하며 제지했다.

“아니 아니 제임스, 진정해요. 난 그들이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아, 네. 죄송합니다. 잠시 흥분을.”

“세대가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제임스나 나나 이제 지나가는 세대잖아요. 하지만 미스터 포그 당신은 우리보다는 그들에 가까우니까 신입들 데리고 팀을 좀 맡아줘요. 내가 몇 가지 일을 맡겨 볼까 하거든. 그러면서 누가 우리 회사랑 맞는지도 살펴보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신입들 데리고 특별팀을 한번 꾸려 보라는 이야기지. 회사 생활도 좀 가르치고. 팀장이야, 이 사람아 팀장.”

포그씨는 갑작스러운 클라라의 제안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교활한 제임스와 공모한 것을 볼 때 결코 좋은 제안은 아닐 것이다. 포그씨는 친절한 웃음 뒤에 가려진 진짜 의도를 알아내야만 한다.

회사는 올해 초 몇 년 만에 신입사원 모집을 했다. 게다가 이례적으로 사람을 많이 뽑았다. 정부의 압력과 지원이라는 외부요인도 없지 않았을 터였다. 3차에 걸친 시험을 통과한 신입들에게 회사는 인턴이라는 지위를 주고 최소 1년 동안 그들의 열정을 페이보다 더 뽑아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신입들은 인턴이라는 불안한 위치에도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잘 길들여지지 않았다. 회사가 그들을 재고 있듯 그들도 회사를 재어 보고 있었다. 손에 꼽을 만큼 안정된 규모의 기업이 아니라는 것도, 혁신이니 뭐니 이런 변화도 남의 집 얘기처럼 여겨지는 고루한 회사 분위기라는 것도 젊은 세대들에게서 매력을 잃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젊음이라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친절한 제시만 해도 상냥하고 귀염 떠는 말투와 달리 일에서는 칼같이 선을 지켰다. 은근슬쩍 넘어오는 타 부서 상사의 업무들이 제시의 업무경계를 통과하지 못했다. 웃는 얼굴로 제시는 단호히 거절했다. 회사는 이런 젊은 세대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신입들이 속한 부서에서 불만과 갈등이 터져 나왔다.

‘한 번에 예 하는 경우가 없어. 왜요, 왜요, 아주 그냥 그 왜요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야.’, ‘까라면 까는 시절도 지났고 하라면 하는 시절도 지났고. 에고 중간에 낀 우리만 불쌍하지.’, ‘출근시간, 퇴근시간 있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 아주 그냥 알람이야, 알람. 책임감도 없고 봉사정신도 없고.’

이쯤 되면 클라라가 유례없이 신입들만 데리고 팀을 꾸린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그 팀의 팀장을 맡으려 하지 않는 것도.

“회사가 변하지 않으면 결국 인재들이 회사를 떠나게 될 것이야.”

신입들이 문제가 아니라 회사가 문제라고 하는 사람은 현명한 경비 헨리 밖에 없었다. 마땅한 취미도, 동호회도 없던 포그씨는 세상에서 분리된 소행성같이 외롭고 어두운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이면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헨리와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에이, 그래도 이만한 회사가 어딨어요? 가뜩이나 취업하기 어려운 때에.”

“결국엔 사람이야. 회사는 결국 사람을 경영하는 거라고. 사람이 있어야 회사도 있는 거지. 지금도 봐, 괜찮은 사람들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있잖아. 자네는 어떤가?”

“사람들 다 떠나도 저는 남아 있을 겁니다. 저같이 애매한 나이는 갈 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으니.”

이번에 한번 실수를 하긴 했지만 회사 안에서 포그씨는 성실함과 노련함으로 어느 정도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까다로운 상사나 천방지축 젊은 직원들과도 큰 트러블 없이 원만하게 지내왔다. 이 정도면 우수 인재는 못 되어도 필요한 사람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큰 재미는 없어도 딱히 나쁠 것도 없어 보였다.

사장실을 나온 포그씨는 머릿속이 하얘지다 못해 정신이 몽롱해졌다. 단지 하룻밤 씻지 않았을 뿐인데 비를 맞아서인지 온몸이 가려웠다. 체온도 계속 오르고 있었다. 이 뜬금없는 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기 전에 일단 씻고 푹 자고 싶었다. 그전에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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