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그씨! 우리 팀 팀장이 되셨다면서요? 너무 좋아요. 안 그래도 신입들 중 제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팀장님 오실 때까지 리더를 맡고 있었거든요. 근데 뭐 아시다시피 제가 경험도 부족하고 마음도 약하고. 아, 아니 어디 몸이 불편하세요? 약 드릴까요? 무슨 약이 필요하지?”
포그씨는 가방을 가지러 자리에 들렀다가 친절한 제시에게 또다시 붙들리고 말았다. 제시는 어떻게 벌써 아는 걸까? 비서하고 친구라도 되나? 친절한 제시가 아니라 정보 빠른 제시라 불러야겠군. 혼자서 호들갑을 떨던 제시는 포그씨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놀란 포그씨는 뒷걸음질 치다 넘어질 뻔했다. 그녀의 손은 살짝 스치기만 했음에도 매우 차가웠다.
“어머, 어떡해. 몸이 불덩이 같아요.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괜찮아요.”
“아, 그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디자인 선정 회의부터 와 주실 수 있나요? 이제는 팀장님이니까 오셔도 되잖아요. 아니 오셔야 되죠. 제가 포그씨 얘기를 벌써 다 해놨거든요.”
눈치 제로 제시로 바꿔야겠군. 괜찮다는 말을 진짜 괜찮다로 듣다니, 서운함과 짜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포그씨는 제시의 호들갑스러운 제스처에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몸에 문제가 생기긴 생긴 모양이었다. 어제 술이 덜 깬 걸까? 아니면 비 맞아서 감기라도 걸렸나?
“제시, 미안한데 내가 오늘은….”
포그씨는 바람 뺀 주유소 에어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포그씨! 포그씨!”
다급한 제시의 외침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만 좀 소리 질러. 머리 아프다고.
포그씨가 눈을 뜬 곳은 병원 응급실이었다. 상체를 일으키자 다시 머리가 팽하고 돌았다.
“누워 계세요. 링거 이제 들어갔어요. 이거 다 맞으셔야 댁으로 가세요.”
링거줄을 만지던 간호사가 주어 없는 문장들을 차갑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기억 안 나세요? 회사에서 쓰러지셨고요, 구급차 타고 오셨고요. 열이 너무 나서 여러 가지 검사했는데 아직 결과가 다 나온 건 아니지만 현재로는 탈수 외에는 특이사항 없으세요. 며칠 입원하셔야 되는데 당장은 입원실이 없어서 오늘은 여기 계셔야 해요.”
“입원이요? 특이사항 없다면서요?”
차가운 간호사가 링거 조절밸브를 만지다 눈만 포그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검사결과가 아직 다 안 나왔다고요. 열이 내릴 때까지는 계속 계셔야 돼요. 원인을 알아야 하니까.”
“감기 아닌가요?”
“제가 의사가 아니라서요. 환자분도 그렇고요.”
간호사는 외국인에게 설명하듯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했다. 포그씨는 기분이 나빴지만 마땅히 대응할 말도, 힘도 없었다. 아직 한참이나 남은 링거병에 조명이 비쳐 눈이 부셨다. 포그씨는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가렸다. 할 수만 있다면 간호사 보고 여기 누워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닫았다. 저 링거만 다 맞으면 집으로 가야지. 입원이라니, 병원도 결국 환자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내 지갑을 노리고 있군. 온갖 몽롱한 생각 속에 포그씨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 교활한 제임스가 포그씨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는 하와이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꽃목걸이를 포그씨에게 걸어 주었다. 목걸이에서 묘한 꽃향기가 났고 이내 섬뜩한 차가움이 목덜미에서부터 발끝까지 내려왔다. 뒤에서는 완벽한 클라라가 흐뭇한 듯 웃으며 느리게 박수를 쳤다. 포그씨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포그씨가 ‘땡큐’라고 말을 하는 순간 제임스는 돌아섰고 포그씨는 목이 앞으로 세게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꽃목걸이에 달린 줄이 제임스의 손에 연결되어 있었다. 포그씨는 두 손으로 꽃목걸이를 빼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개가 목줄에 끌려가듯 제임스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제임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헉!”
포그씨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눈만 번쩍 떴다. 조심스레 손가락, 발가락을 움직여 보니 다행히 꼬물거려진다. 마비가 온 건 아니었다. 포그씨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아, 여기 병원이었지. 응급실이었지만 다른 응급환자가 더 없었는지 조명이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하나 둘 셋’ 포그씨 포함해 네 명의 환자가 띄엄띄엄 누워 있었다. 다른 간호사 한 명이 와서 체온을 재고 갔다. 링거는 투명한 병에서 오줌처럼 노란 병으로 바뀌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포그씨는 다시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두려웠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집으로 가자. 집에 가면 다 괜찮아질 거야.
다음 날 아침, 다행히 포그씨의 체온은 정상을 되찾았고 포그씨는 병원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감정 없이 차트를 보던 의사가 3일 후 다시 방문하라고 했지만 포그씨는 3일 동안 아무 일 없으면 안 와도 된다는 말로 해석했다. 병원비를 휴대폰의 은행페이로 결제하고 통화목록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많이 와 있었다. 제임스에게 전화하려는 순간 짧은 멜로디를 남기며 휴대폰이 꺼졌다.
‘퇴근이냐? 주인도 아직 퇴근을 못했는데 먼저 가고 있어.’
포그씨는 마음을 여유롭게 가져 보기 위해 자신을 위한 유머를 했다. 퇴근. 회사를 나오는 게 퇴근인 거야, 집에 들어간 게 퇴근인 거야? 포그씨는 휴대폰이 꺼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실려 간 것은 벌써 소문이 다 났을 테고 휴대폰도 꺼졌으니 누가 날 찾아도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이대로 영영 사라질 수도 있을까? 그래도 일단은 피곤하니 집으로 가자. 버스 아니 택시를 타자. 버스든 택시든 타기 위해서는 이곳의 위치를 알아야 했다. 무심결에 꺼진 휴대폰을 터치하던 포그씨는 휴대폰 화면만큼 머리가 캄캄해졌다.
‘이런! 꺼졌지.’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쓰러진 포그씨를 병원으로 옮기면서 사람들은 빈 몸뚱이만 병원으로 보냈다. 가방도 지갑도 없었다. 호주머니에 있던 휴대폰만이 유일한 소지품이었다. 그리고 그 휴대폰은…. 포그씨는 머리가 다시 핑 돌았다. 햇살이 너무 눈부셨다.
도시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 온갖 위성들이 하늘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덕에 아프리카에서도 맛집을 찾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그는 자신의 위치도 집으로 가는 방향도 잃었다. 나만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포그씨는 다시 온몸이 떨릴 듯한 한기를 느꼈다. 막막함과 자유로움이 한 번에 몰려왔다. 두 개가 섞일 수 있는 감정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어떻게 하든 집은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서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누구든 자신을 도우러 와 줄 것이다. 아니면 파출소라도. 아, 머리가 계속 아프군. 그는 병원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앉아서 쉴 곳이 필요했다. 한낮의 더위가 사람들을 몰아낸 탓에 덩그러니 앉아 뜨거운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벤치가 보였다. 그는 오한으로 벌벌 떨리는 몸을 양팔로 꼭 감싼 채 달궈진 벤치 끝에 조심스레 앉았다.
햇살은 따뜻했다. 벤치에 두 다리를 올리고 무릎 위에 팔을 접어 고개를 숙였다. 구부러진 등 위로 햇살이 포근히 쏟아졌다. 포그씨는 옷을 벗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대로도 좋았다. 아니 그보다 옷을 벗는 행동 자체가 귀찮게 느껴졌다. 재킷이라도 벗을까, 그대로 있을까, 벗을까, 그대로 있을까…. 세상 고민이 그게 다인 듯 동굴 속처럼 크고 무거운 소리들이 온몸을 울려 대고 있었다.
“왜 그렇게 젖어 있니?”
“비를 맞아서요.”
“비는 이미 그쳤어. 지나가는 비야.”
“...”
“젖은 옷은 이제 그만 벗는 게 어때?”
포그씨는 자신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어머니인가? 친구였던가? 아니면 누구일까? 누구든 상관없었다. 포그씨는 대화를 붙잡고 싶었다.
“... 싫어요.”
포그씨는 젖은 옷에 익숙해진 자신을 깨달았다. 다시 바짓단 끝에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포그씨는 누가 억지로 옷을 벗기기라도 하는 듯 온몸을 동그랗게 말고 팔로 자신을 꽉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