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그! 포그!”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웠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듯 포그씨는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포그, 이 봐, 포그! 자네 괜찮나?”
현명한 헨리였다. 아주 짧은 순간에 그는 제임스를 떠올렸다. 다행이군, 헨리야 헨리.
“저런, 땀으로 옷이 다 젖었구먼. 병원에서는 나갔다 하고 전화는 안되고 한참 찾았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헨리는 포그씨를 데리고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 갔다. 포그씨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쭉 들이켰다. 한 번에 컵의 반이 얼음만 남았다. 이어 부드럽고 짭짤한 소금빵까지 먹고 나자 포그씨는 이제야 비로소 눈이 뜨이는 것 같았다.
‘링거 보다 커피가 낫군.’
커피를 마시며 포그씨에게서 회사의 일을 들은 헨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결국 클라라가 칼을 들었군.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건만. 하긴 내가 현역에 있을 때도 그랬어. 높은 데 있으니까 어찌 된 게 시야가 더 좁아져.”
현명한 경비 헨리는 유명 회사의 오너 출신으로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도 그는 정년퇴임 후 타회사 경비를 지원했다. 천생이 일꾼 팔자라서 놀면 죽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골프니 낚시니 하는 것도 체질에 맞지 않다고 했다. 회사는 그의 경력을 인정해 회사 고문 자리를 권했지만 그는 한사코 경비를 지원했다. 인터넷 뉴스에도 크게 나는 바람에 회사는 그를 채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비로 들어왔지만 회사에서는 그의 나이를 고려해 주간근무만 하도록 했고 퇴근 후엔 회사 임원부터 말단 직원까지 비공식 상담가 역할을 하며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특히 포그씨처럼 퇴근 후 딱히 갈 곳이 없던 사람들이 자주 그와 술잔을 기울이며 구질구질한 인생 상담을 했다.
“높은 데 있을수록 더 넓게 볼 것 같지? 안 그래. 나이가 들수록 더 포용할 것 같지? 그것도 안 그래. 높은 데 있으면 누가 내 사다리를 흔들 것 같고, 나이 들면 잃어버릴 것 투성이라 더 꽉 쥔다니까. 건강도, 사람도, 돈도. 클라라는 너무 일찍 높은 데 올라갔어. 한때는 젊은 패기로 무서울 게 없었던 사람인데 이젠 자기처럼 젊은 패기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한 거야. 하긴 나도 그 자리에 있을 때는 내 자리 지키고 내 사람 만드는 것이 나를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었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나를 불안하게 하니까. 높은 자리라는 게 원래 그래. 그나저나 자네가 걱정이구만.”
“제가요?”
“내 예감이 틀리길 바라네만, 자네를 팀장으로 앉힌 것은 자네보고 신입들 평가를 하라는 거야. 자네가 작성한 평가 보고서에 따라 정규직이 될 사람들과 회사를 나가야 할 사람을 가릴 걸세.”
“아니, 그 중요한 일을 왜 제게? 인사과도 있고 또 자기들이 직접 해야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를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자네도 평가 대상이기 때문이지.”
“네? 그게 무슨. 제가 왜요? 저는 진짜 이 회사를 위해, 진짜 다른 데 신경 안 쓰고 회사만 충성한 사람인데.”
포그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포그, 클라라는 회사에 충성하는 사람 말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원해. 그렇게 보면 자네는 애매하지. 어떤 말로 자네한테 팀장 자리를 권했는지 모르지만 들리는 대로 믿지는 말게. 뭐, 자네한테 맡겼다지만 실은 모든 건 다 정해져 있어. 신입 중 몇몇은 이미 이 회사 사람이고 몇몇은 들러리지. 내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 점이야. 실력은 보지 않고 배경만 보는 것. 아니면 약삭빠른 놈들은 벌써 뒤로 거래가 있었을 거야. 클라라와 거기 딱 붙어 있는 자들은 자네가 이 일에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줄 수 있는지 궁금할 걸세. 그러길 바라기도 하고.”
“설마요. 혹시 제가 거부하면요?”
“궁금하나?”
“...”
포그씨는 궁금했지만 답을 들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헨리는 미소를 지었지만 포그씨는 헨리의 말에서 부인할 수 없는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온몸의 피가 지하로 다 스며들어 하얀 영혼만 남은 듯 포그씨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 자네도 선택의 자리에 온 거야. 제임스 같은 인간이 될 것인지, 순수하고 양심적인 포그 자네의 모습을 지킬 것인지. 테스트는 클라라만 하는 게 아니야. 스스로도 자신을 시험하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지 방향을 잡아가는 거야. 누구에게나 빠져나갈 수 없이 곤란에 처하는 상황이 와. 갑자기 비를 맞는 것처럼 말이야.”
“비요?”
포그씨는 무방비로 비를 맞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비는 자주 내렸지만 왜 한 번도 자신이 비를 맨몸으로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살다 보면 한 번은 비를 피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와. 속절없이 비를 맞아 옷이 다 젖어 버리면 마음도 우울해지지. 처음엔 이까짓 거 하다가 결국 하늘을 탓하기도 하고 우산을 준비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게 끝인가? 비를 피할 순 없지만 옷은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지 않은가? 비에 젖은 옷은 갈아입지 않으면 말려도 냄새가 나게 되어 있어. 지금 자네처럼 말이야. 언제부터 내가 이 냄새를 참았는지 몰라.”
헨리가 갑자기 놀리듯 껄껄거리며 웃었다.
“헨리, 너무 하시네요. 저는 어쩔 수 없었다고요.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포그씨는 비를 맞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 서러움과 억울함을 빨리 해명해야 했다. 포그씨는 누군가 자신을 일부러 괴롭히며 놀리고 있는 기분까지 든다고 하소연했다.
“비에 젖은 옷을 3일째 입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네!”
포그씨는 다시 한번 힘주어 대답했다.
“포그, 내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 말이지, 우리 회사에도 엄청난 위기가 여러 번 있었어. 그때마다 나는 직원들부터 잘랐어.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회사가 망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많은 직원들을 잘라냈어. 클라라보다 더 심각했지.”
“다른 회사들도 그땐 다 그렇게 했어요. 헨리. 어쩔 수 없었잖아요.”
“포그 자네가 만약 그때 해고 명단에 있는 직원이었다면 지금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배가 기울어진다고 사람들을 바다에 빠뜨릴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물을 퍼내고 죽을 각오로 노를 저었으면.”
“헨리 잘못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포그씨는 헨리의 손을 잡았다.
“다 늙어서 주책이군. 포그,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다 핑계야. 그냥 내가 그 상황에 겁을 먹은 거야. 부딪쳐 보기도 전에 소중한 것들을 쉽게 놓아 버렸어. 내 잘못이 아니잖아 하면서. 클라라의 제안 아마도 피할 수 없을 걸세. 계속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될 거야. 이 비를 피하면 다음 비가, 또 피하면 또 다음 비가. 하지만 비는 결국엔 그쳐. 옷도 마르겠지. 하지만 냄새는 어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젖은 옷에 자네 몸을 적응시키지는 마. 요즘 비는 산성비야. 옛날 하고는 달라.”
포그씨는 농담으로 마무리하는 헨리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지만 그 끝에 상쾌한 박하향이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헨리는 포그씨에게 택시를 잡아 주고 택시비를 넉넉히 손에 쥐어 주었다.
“꼭 갚을게요.”
“그럼. 내 호의는 커피값까지만. 알지? 일개 경비 돈 떼어먹으면 벌 받아.”
“네, 회장님”
“어허, 이 사람이 사람 좀팽이로 만드는 재주가 있어.”
택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끊고 출발했다. 포그씨는 사흘 만에 퇴근을 했다. 샤워를 하고 빨랫줄에서 바짝 마른 옷들로 갈아입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병원에서 가져온 약을 먹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는 약기운을 빌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휴대폰은 꺼진 채로 충전을 하고 시계로 알람을 맞췄다.
‘내일부터는 우산을 꼭 챙겨야겠어. 여벌 옷도 사물함에 두고. 그래도 내일 날씨가 좋으면 좋겠군.’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 잡히지 않으려 TV를 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호들갑스러운 제시 얼굴이 떠올라 다시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제시. 일단 제시부터 적응을 해야겠군.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포그씨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TV에서는 기상캐스터가 내일의 날씨를 자세히 알려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