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이달꿈

나나의 방 1

by 최여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말이야, 우리 집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하루 종일 이야기를 만들며 놀았어. 내가 만든 이야기 속 인물들은 가끔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내 앞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 때로 저 멀리서 나를 보기도 하고 옆에 와서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해. 그들은 나에게 말을 걸진 않지만 힘들 때나 슬플 때 가만히 나타나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


“여기서 뭐 해?”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는 남의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나에게 물었다.

“미진이 기다려.”

“너 혹시 아침 먹고 지금까지 여기 있었어?”

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되는 듯 나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가자.”

“미진이가 조금만 기다리래. 그럼 들어가게 해 준대.”

“그렇다고 여기서 하루 종일 기다려? 안 열어 주면 그냥 가면 되지.”

나나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나나의 등 뒤로 노을은 지고 있었고 다음 날까지 미진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나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동네에는 나나와 같은 또래의 친구가 없었다. 나나는 언니들을 따라다니거나 다섯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을 데리고 놀이터에서 놀았다. 언니들은 나나를 잘 끼워주지 않았고 동생은 하루 종일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어느 날 미진이 나나의 동네로 이사를 왔고 나나의 반이 되었다. 미진의 아빠는 학교 선생님으로 승진을 위해 도시에서 이 작은 시골로 부임을 해왔다. 미진의 아빠는 미진이 적응할 수 있도록 나나를 자주 집으로 오라고 했다. 나나는 친구가 생긴 것도, 친구의 집에 놀러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미진은 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나는 키가 작았고 몸에 맞지 않는 언니들의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촌티가 났다. 변변한 가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친구라고는 나나밖에 없었기에 미진은 나나가 집에 오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나나는 거의 매일 미진의 집에 놀러 왔지만 미진은 한 번도 나나의 집에 놀러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나에게 미진의 집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언니들과 남동생까지 모두 한 공간에서 먹고 생활하는 나나의 집과 달리 그곳에는 ‘미진의 방’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침대와 책상이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빼곡히 꽂힌 책들이 있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책들이 번호를 맞춰 흐트러짐 없이 꽂혀 있는 것을 보자 나나는 가슴에 새로운 감각이 스며 오는 것을 느꼈다.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아무도 펼쳐 보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가 ‘쩍’ 소리를 내며 열렸다. 미진의 눈치를 살폈지만 미진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거 읽어 봐도 돼?”

미진은 침대에 엎드려 엄마 방에서 가져온 여성잡지책을 보고 있었다.

“맘대로”

미진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나나는 그 자리에 앉아 세계명작전집이라고 적힌 책을 1번부터 읽기 시작했다. 다음 날도 나나는 미진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둘은 어제처럼 각자의 책을 읽었다. 나나의 책 속에는 여러 소녀들이 있었고 다락방일지라도 모두 그들의 방이 있었다. 그들은 어깨가 잔뜩 부풀려진 원피스를 입고 또각또각 소리가 날 것 같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가난하고 힘든 일을 겪어도 아무도 혼자가 아니었다. 외롭고 슬퍼서 울고 있으면 쥐, 고양이, 원숭이들이 찾아와 모두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새로운 행복의 문이 열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나는 빨간 지붕집에 살기도 하고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빙그그르 돌기도 했다. 식탁에는 김치와 장아찌 대신 빵과 수프가 놓여 있었고 반찬을 서로 먹으려고 다투는 일도 없었다. 나나는 더럽고 누추해도 자신의 방을 가진 소녀들을 동경했다. 그렇게 한동안 나나는 날마다 미진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공간으로 빠져들었다.

“야, 너 내 책 읽는 대신 숙제 좀 해줘. 저 책 다 비싼 거란 말이야.”

책상 위 작은 거울 앞에서 엄마 립스틱을 찍어 바르던 미진이 나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숙제? 무슨 숙제?”

“시험지 틀린 거 쓰는 거 있잖아. 넌 다했어?”

사실 나나는 쓸 게 없었다. 하지만 100점이라 숙제가 없다고 말하면 미진이 마음 상할까 봐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숙제는 자기가 직접 해야…. 그래야 틀린 것도 알고.”

“야, 모르니까 틀린 거지. 알면 왜 틀렸겠냐? 모르는 걸 공책에 다시 쓰면 아냐? 너는 많이 안 틀렸을 거 아냐? 그러니까 책값 좀 내.”

“그래도.”

“그래? 그럼 너 이제 우리 집에 오지 마. 책도 보지 마. 내 거야.”

나나는 할 수 없이 미진의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틀린 수학 문제를 하나씩 공책에 쓰기 시작했다. 미진은 입술을 빨갛게 칠한 채로 다시 침대에 누워 잡지책을 보기 시작했다. 나나는 무릎까지 올라온 미진의 하얀색 반스타킹을 슬쩍 보았다. 문득 저 스타킹을 신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미진! 이게 뭐 하는 거야?”

미진의 아빠였다. 미진은 잡지책을 배에 얹은 채 잠이 들었고 나나는 수학 시험지를 끝내고 사회 시험지를 쓰느라 미진의 아빠가 들어온 줄 알지 못했다. 미진의 아빠는 나나가 쓰던 공책을 들더니 표지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미진이 벌떡 일어나 잡지로 입을 가렸다가 다시 잡지를 등 뒤로 감추고 대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거 니 공책이잖아? 이걸 왜 얘가 적고 있어?”

“쟤가 먼저 도와준다고 했어요.”

미진은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미진의 아빠는 학교에서 볼 때보다 더 무서웠다. 나나는 의자에서 일어나긴 했으나 얼음처럼 몸이 굳었다. 그날 미진은 나나가 있는 앞에서 한동안 더 꾸지람을 들었다. 미진의 아빠는 말 끝마다 미진과 나나를 비교하며 말했다. 거기에는 나나가 매일 읽는 책을 미진은 하나도 읽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미진의 동생 민호가 일러바쳤을 것이다. 말을 할수록 점점 더 화가 차오른 미진 아빠는 급기야 나나가 적은 숙제 공책을 찢어 버렸다. 미진에게도, 미진 아빠에게도 나나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미진은 눈물을 뚝뚝 흘렸고 립스틱이 볼까지 번져 얼굴이 엉망진창이 된 것을 민호가 킥킥 대며 지켜보고 있었다. 나나는 미진의 아빠가 방을 나가고서야 조용히 그 집을 나올 수 있었다. 아무도 잘 가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도 그들은 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진은 친구들과 하루 종일 수다를 떨었고 나나는 학급 문고에 있는 낡은 책들을 만지작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그 하루를 보내는 동안 나나는 공기가 코끼리 무게보다 무겁다는 책의 내용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하루 종일 어깨에 공기짐을 지고 그림자처럼 교실을 돌며 미진의 눈치를 살피다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나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나나도 그 일이 사과를 받아야 하는 일인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사과를 받지 못한 상처는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되어 나나의 마음에 살게 되는 것도. 주말을 앞두고 나나는 미진에게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내일 너네 집에 가도 돼?”

“맘대로.”

미진은 나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나는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고 믿었다. 주말 아침 나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미진의 집 앞에서 미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미진은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미진은 그 말만 반복했다. 돌아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나는 엄마가 오기까지 하루 종일 미진의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엄마는 다시 미진의 집에 가지 말라고 했고 나나는 한동안 다 읽지 못한 그 책들을 생각했다. 그렇게 나나의 세계가 문을 닫아 버렸다. 나나는 기다리라는 말이 거절보다 지독한 괴롭힘임을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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