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이달꿈

나나의 방 2

by 최여름

모두들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아무도 나와 같은 세계에 살지 않아. 각자의 세상에서 아주 작은 창으로 다른 사람의 세상을 바라볼 뿐이지. 어느 날 아무도 관심 없던 작은 물건 하나가 그런 내 세상을 꽉 채울 때가 있어. 예고 없이 찾아와 내 세상을 한 뼘 더 열어 주던 그런 것. 너무 소중해서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아무도 몰랐던 그 꿈같던 순간.


학교에 새로운 책들이 들어왔다. 나나가 입학한 후 새책이 들어왔다는 소식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책들은 도서실에 가지 않고 교무실 캐비닛에 꽂혔다.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단행본으로 판매하는 책이라고 했다. 나나는 교무실에 들어가 책을 보고 싶다고 말했고 선생님은 살 거냐고 물었다. 나나는 답을 하지 못했지만 선생님은 캐비닛 문을 열어 주었다. 미진의 집에서 본 것과 달리 크기와 높이가 다른 책들이 캐비닛 두 칸에 가득 꽂혀 있었다.

“이 칸은 900원이고 이 칸은 1,500원이야.”

나나는 천천히 제목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회의 시간이라며 캐비닛 문을 바로 닫아 버렸다. 나나는 캐비닛 속에 갇힌 이야기들이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나나에게는 돈이 없었다. 한 번도 용돈을 받은 일도, 용돈을 쓸 일도 없던 시절이었다.

“엄마, 나도 용돈 받고 싶어요.”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는데 돈이 왜 필요해?”

옆에서 그날 인부들 작업 일지를 적던 아빠가 잔뜩 화가 난 말투로 물었다. 아빠는 평소에도 늘 화가 나 있다.

“책 사고 싶어요. 학교에서 파는 책.”

“책?”

아빠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얼만데?”

엄마가 물었다. 목소리에 긴장과 걱정이 묻어 있었다.

“1,500원. 아니 900원도 괜찮고. 그냥 달라는 건 아니고 저도 일을 할게요 뭐든.”

그렇게 나나는 엄마 아빠를 따라 처음으로 논에 나갔다. 한창 추수가 시작된 논에 가지런히 벼들이 누워 있었고 논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탈곡기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나나는 묶인 볏단들을 가져와 어른들에게 넘겨주는 일을 했다. 탈곡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왕겨 가루들이 온 얼굴과 옷에 달라붙어 까슬거리기 시작했다. 나나는 부지런히 벼를 날랐다. 엄마와 아빠는 별 말이 없었지만 같이 일하는 아저씨들이 연신 어린것이 대견하다고 칭찬을 했다. 그렇게 나나는 900원을 받아 교무실의 열린 캐비닛 앞에 다시 섰다. 조금 두꺼운 책들은 1,500원이었고 얇은 그림책은 900원이었다. 나나는 제목만 보고서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 책을 뽑으려 하면 옆에 있는 책이 시선을 끌고 그 책을 뽑으려 하면 다른 책이 더 재미있어 보였다. 나나는 고민 끝에 ‘이야기 주머니’라고 적힌 책을 골랐다. 아무래도 주머니라는 말이 붙었으니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나는 혼자 맛있는 것을 먹으려는 사람처럼 방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아 책을 읽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한 총각이 있었어. 그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주머니에 넣어 꽁꽁 묶어 놓았대. 어느 날 총각이 장가갈 때가 되자 주머니 속에 갇혀 있던 이야기들이 한 번도 세상 구경을 못한 것에 분을 품고 총각을 해코지하기로 했어. 이를 눈치챈 하인이 이야기들의 공격으로부터 총각을 구해 내게 되고 총각은 결국 주머니를 열어 이야기들을 세상 속으로 훨훨 날아가게 해 주었대.’

나나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처음으로 생긴 자신의 책이었다. 나나는 이야기들이 가득 차 터질듯한 그 주머니를 생각했다. 꽁꽁 묶인 주머니 속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치는 수많은 이야기들. 나나는 말이 없는 아이였지만 그 작은 마음에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수다쟁이가 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해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수많은 이야기들도 있었다. 나나는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 주머니도 세상 밖으로 꺼내놓고 싶어졌다. 시끄러운 수다쟁이도 그만 풀어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머니에 갇힌 이야기들이 자신을 점점 더 괴롭힐지도 몰랐다. 나나는 쓰다 만 공책을 꺼내 연필 흔적이 있는 부분을 다 찢어 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작은 공책이 나나의 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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