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인데 내가 고를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나는 비싼 옷보다 반짝이는 구두보다 예쁜 이름이 갖고 싶었어. 세상에서 나를 찾아내는 이름, 나만 대답할 수 있는 내 이름. 동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주인공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어. 나도 언젠가 특별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나나의 이름은 '남이'였다. 간혹 이름의 뜻을 묻는 사람에게는 뜻 대신 언니들 이름을 알려 주면 되었다. 동이, 서희, 남이, 그리고 막내는 준혁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모두들 그냥 나나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처음으로 부른 사람은 나나의 3학년 때 선생님이었다. 날카로운 눈에 짙은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선명하게 바른 나나의 선생님은 그 인상만큼이나 무서웠다. 그러나 선생님의 또 다른 호칭은 동화작가였다. 나나는 동화 쓰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동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보이지 않는 공기 속에서 물방울이 맺히듯 떠돌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동화가 되는 줄 알았다. 선생님이 썼다는 동화는 어린이 잡지에 자주 실리곤 했는데 그 동화 속에는 군인이 자주 등장했다. 나나는 선생님이 만든 동화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변한 선생님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부임 온 첫날부터 시골 아이들의 이름이 다 촌스럽다며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바꿔서 불렀다. 미영, 덕구, 선희, 동철이들이 미미, 도도, 써니, 동동이로 바뀌었다. 남이도 나나가 되었다. 몇몇 아이들은 어색해했지만 나나는 바뀐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나라는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이름 하나로 나나는 변두리 소녀에서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나나는 가족들에게도 나나로 불러 달라고 졸랐고 언니들은 비웃었다. 아기 때부터 순해서 떼 한 번 쓰지 않던 아이가 ‘남이’라고 부를 때마다 억지를 부리자 엄마가 먼저 나나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이는 나나가 되었다.
어느 날부터 나나는 수업이 끝나도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교실 뒤에 혼자 남았다. 집에 가도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나나는 친구들 다 가고 빈 교실에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다. 선생님이 일을 할 때 나나는 책을 읽었다. 그러다 선생님이 교무실에 회의를 하러 가면 교실은 온전히 나나의 차지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책상에서, 사물함에서 뭉근히 배어 나왔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 쿵쾅거리는 소리들이 복도에서도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사방이 고요해지면 나나는 학급 문고의 낡은 책들 중에서 한 권을 골라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나나의 교실에는 학생 수준에 맞지 않는 낡고 오래된 책들이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은 채 태연하게 꽂혀 있었다. 나나가 책장의 제일 끝에서 찾아낸 책은 북한 간첩이었던 사람의 오래된 수기였다. 나나는 한동안 그 책에 빠져 간첩이 집에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상상을 했다. 동화와는 또 다른 세계가 책 속에 있었고 나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 간 흔적들을 책 속에서 찾아내었다. 책은 나나와 세상을 연결해 주었지만 가끔 엉뚱한 곳으로 나나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나는 책이 여러 얼굴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교실에 있어도 소리조차 나지 않는 나나를 선생님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왜 남아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나나는 집보다 학교가 더 편안했고 늘 그렇게 그림자처럼 조용히 교실 뒤에 남아 있었다.
가끔 선생님은 교실에 남아 있는 나나에게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이 교실에서 저 교실로 문서를 전달하기도 하고 학교 앞 문구점 겸 가게에서 간식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날도 선생님은 나나에게 학교 앞 가게에서 사이다 한 병을 사 오라고 했다. 천 원짜리 지폐를 쥐어 주고는 교실에는 병따개가 없으니 아예 뚜껑을 따서 들고 오라고 했다. 나나는 빨리 마시지 않으면 김이 다 빠진다는 가게 아주머니의 말에 사이다를 들고뛰었다. 병 속에서 넘실대던 액체가 진동을 참지 못하고 나나의 손등 위로 뿜어져 흘러내렸다. 병 속의 수위가 처음보다 많이 낮아졌다. 나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혼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남학생들도 눈물을 쏙 빼놓는 분이라 교실은 늘 긴장감이 맴돌았다. ‘오다가 마셨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나나의 걸음이 무거워졌다. 교실에는 선생님이 없었다. 책상 위에 사이다와 거스름돈을 올려놓았다. 다시 봐도 양이 확 줄어 있었다. 나나는 선생님을 기다려야 할지 그냥 가야 할지 고민했다. 조금 기다려 보았지만 선생님이 오지 않자 나나는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선생님은 줄어든 사이다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나는 더 이상 교실에 혼자 남지 않았다. 나나의 공간이 또 그렇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