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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옥수수 Aug 18. 2024

부모님이 이혼하신 지 20년 됐습니다

이혼가정이 내게 남긴 것들

내 생일을 맞아 엄마랑 남편이랑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엄마가 말했다.

"어제 드라마 굿파트너를 보면서 또 하나 배웠잖아"

내가 물었다.

"뭐를?"


대강 엄마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랬다.
나랑은 이혼했지만 내 자식에겐 아빠니까 아빠와의 좋은 기억, 아빠를 있는 그대로 본인이 판단할 수 있도록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나는 바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아빠 욕 하지 말고, 아빠한테도 엄마 욕하지 말라고 한 거잖아"

엄마는 미안함에 고개를 떨구는 듯했다.



어느덧 부모님이 이혼하신 지 20여 년이 됐다.

삼십 대 중반의 내 인생에선 60% 정도로 절반이 넘는 세월이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 되짚어보고자 이 글을 쓴다.


우리 집은 언제 어떻게 이혼 가정이 되었고, 20년의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보려 한다.


언제, 어떻게 이혼가정이 되었나?


우리 집은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둔 중산층의 평범한 가정이었다.
맞벌이셨다가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해 엄마는 15년 넘게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됐고, 아빠는 혼자 버는 외벌이가 되셨다.
워낙에 알뜰한 아빠와 똑 부러지는 엄마 덕분에 사는 건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 집은 부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풍족함을 느끼며 살았다.

하지만 두 분은 신혼여행 때부터 이미 갈등이 깊으셨다고 했다.
탄로가 난 건 내가 중학생 사춘기가 되면서였다.


아빠가 꽉 막혀서 말이 통하지 않고 강압적이라서 계속 다투게 되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된 것일까?

두 분이서 잘 숨기고 있던 갈등이 수면 위로 나오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들까지 개입하며 경찰도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엄마랑 살면 가난할 것이라는 걱정과 아빠랑 살면 억압된 환경이 공포스러웠다.
그냥 모든 게 두려웠다.

세상이 멈춘 듯했고, 지칠 대로 지쳤던 10대 시절이었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나는 외고를 갈 정도의 내신 성적을 만들었다.
꼭 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가난해진 환경 앞에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첫째라는 이유로 법정에서 아빠와 살기 싫다고 말해야 했다.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일어서서 판사님께 간곡히 부탁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우리 삼 남매는 엄마와의 가난을 선택했다.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식당 서빙부터 백화점 옷 판매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매주 가족여행을 다니고 외식을 하고, 놀이공원이며 스키장이며 누볐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혼하신 지 20년이 지났지만


나도 동생도 가정을 꾸리고, 막내 동생도 자기 밥벌이를 하면서 엄마는 노후에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해질 줄 몰랐다고 하신다.

아빠도 재혼하셔서 나름대로 잘 지내고 계신다.

우리는 모두 고비를 넘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산다.


하지만 문득 올라오는 감정들이 없어진 건 아니다.

아쉬움, 미안함, 고마움, 원망, 분노, 후회 등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것이지 아직도 가끔씩은 고개를 내민다.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았더라면'의 가정을 하면 끝도 없었다.

상상이니까 내가 누렸을 것만 생각하지, 부모님의 갈등이 더 심해져서 정서적으로 피폐했다거나 부정적인 예시들도 수두룩하다.

그래서 난 새옹지마를 마음속에 새긴다.


인생은 새옹지마


새옹지마는 새옹의 말 즉, 변방 노인의 말처럼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될 수도 있음을 뜻하는 고사성어다.


중국 국경 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에 이웃 주민들이 위로의 말을 전하자 노인은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 하며 태연자약(泰然自若)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도망쳤던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주민들은 “노인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며 축하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이게 화가 될지 누가 압니까?” 하며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위로를 하자 노인은 역시 “이게 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며 표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북방 오랑캐가 침략해 왔습니다. 나라에서는 징집령을 내려 젊은이들이 모두 전장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진 까닭에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새옹지마 [塞翁之馬] - (변방 새, 늙은이 옹, 조사 지, 말 마)


부모님이 이혼함으로써 일찍 철이 들었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깊어졌고 사람을 대하는 폭이 넓어졌다.

무엇보다 '오히려 좋아'라는 말처럼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가정을 꾸린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좋은 점, 반면교사 삼을 점을 잘 배울 수 있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이 끊기면서 스스로 자수성가를 해야겠다는 굳은 다짐도 생겼다.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것에 대해 중점을 두게 되었고, 나답게 삶을 꾸려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유학 보내달라, 대학원 보내달라 했을 텐데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 또한 배우게 되었다.


이 모든 건 살아야 하기에 하는 합리화일 수도 있고,
잘 살고 싶어서 하는 발버둥일 수도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딛고 더 나아가면 된다.

더 행복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뿐이라 생각한다.


어디선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 나의 과거일 수도 있고, 내 부모님의 과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무섭고 두렵고 힘들겠지만 이런 고통이야말로 견디고 버티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게 확실하다.


무엇보다 내가 쉽게 생각하면 쉬운 일이 되는 것이고,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일이 아닌 것이 되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어차피 지나갈 파도니까 조금만 힘을 빼고 몸을 맡기길 바라며 응원과 위로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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