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개나라에서 떡볶이왕자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신혼생활은 달콤할 줄만 알았는데 예상보다 살벌했고, 웃는 날 만큼 우는 날도 많았다.
헤어짐도 생각했었고, 부부상담도 받으며 견디고 견뎠던 2년 6개월.
끝날 것 같지 않던 부부싸움이었지만 우리 부부의 밥 전쟁도 끝이라는 게 있었다.
그 종지부를 찍어준 것은 다름 아닌 ‘컴퓨터’였다.
연애한 지 100일 즈음, 우린 결혼을 결심했다.
남편과 썸을 타던 첫날, 그때였는지도 모른다.
같이 맥주 한잔 하려고 지하에 있는 펍으로 내려가던 중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내가 숨 쉬는 공기의 온도까지 신경 써줄 것 같은 사람 같다’
'내가 설령 사람을 죽이고 와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편이 되어줄 것 같다'
만나보니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서로였기에 결혼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예비부부를 초대합니다
우연히 지나가다 현수막 하나를 보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예비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 '예비부부교실'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참여자들 대부분은 결혼식을 코 앞에 두고 있거나 이제 막 결혼을 한 부부들이었다. 아니면 연애기간이 길어서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하려고 온 커플들.
그 틈 사이 병아리 커플인 우리.
만난 지 3개월 만에 이런 데를 오다니 꽤 성급하거나 꽤 신중하다고 생각하는 눈동자들.
우리가 진짜로 결혼할지 궁금해하는 눈치 같았다. 네, 저희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길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결혼을 결심하고 우린 3년 동안 결혼 준비를 했던 셈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올라가며, 한 발자국씩 꾹꾹 누르며 준비한 결혼.
마음의 준비뿐만 아니라 뭐 하나 허투루 하지 않고 한 결혼인데 맨날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동거 1년 반, 결혼식 이후 같이 산 지 10개월 차.
약 2년 반 동안 남편과 나는 치약 짜는 습관도 맞춰가며 잘 지내는 듯했지만 '밥'앞에 무너져 내렸다.
매일 다이어트하는 남편, 언제나 같이 밥을 먹고 싶은 아내의 대립은 그 어떤 세계전쟁 못지않았다.
먹느냐 마느냐도 문제였지만 어떤 걸 먹느냐 또한 문제였다.
찌개에 환장하는 아내와 떡볶이에 진심인 남편.
언뜻 보면 비슷한 나트륨과 나트륨의 싸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신혼부부의 전쟁 같은 사랑이야기. 그게 바로 내 이야기였다.
집에 PC방을 만들다
친구를 만나거나 걷고, 글도 쓰며 다양하게 행복해하는 나와 달리 남편의 취미는 게임 하나였다.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조심스레 PC방을 가도 되는지 물어봤던 남편.
본인에게는 게임이 유흥이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안 보내줄 수 있었을까.
남편은 주로 불금을 PC방에서 보냈고, 주말에 내가 약속이 있는 날이면 피시방을 찾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난 '결혼하고 PC방을 보내주는 대단한 아내’가 되어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아쉬웠나 보다. 컴퓨터를 사자고 했다.
방 한편에 작은 PC방을 만들고 나서 얼마 안 된 저녁이었다.
꼭 생리가 나오기 전 날 신경질이 나는 나쁜 습관. 남편이 먹잇감이 되었다.
매일 퇴근하고 게임하면서 쉬는 건 알겠는데, 내가 그렇게 같이 밥 먹는 걸(대화하는 걸) 원하면 가끔은 앞에 앉아 있어주기라도 하던지! 그날따라 시비를 걸게 되었다.
끝이 없는 걸 알지만 매번 진지하게 임하게 되는 전투. 밥 문제로 다투는 부부싸움의 장이 열렸다.
보통 아내들은 남편과 하루를 이야기하고 감정을 나누는 것에 큰 의의를 둔다. 나는 특히 더 그런 사람이다.
아무리 말해도 남편은 굽히지 않았다.
부부간에 밥 먹었냐는 정도의 생존신고만 하는 게 무슨 대화냐고, 말을 한다고 다 말이 아니라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건 내게 목숨과도 같이 소중하다고. 여전히 끄떡없던 남편.
데스크톱 컴퓨터를 가리키며 내게 대화는 당신에게 저 게임처럼 소중하다고 이야기했다.
아직 나의 변호는 한참 남았었는데, 남편의 눈빛이 갑자기 ‘유레카!’
아내에게 대화는 남편의 게임과도 같은 것
게임 없이 살 수 있냐고 물어봤다.
자신 없는 눈빛으로 자신 있는 척 대답하는 남편이었다. 있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당신과 생각을 나누며 대화하는 건 내게 그만큼 소중하다고 했다.
생명줄인 목숨에 비유했을 때에도 씨알도 안 먹히던 남편이었는데 게임에 저렇게 크게 반응하다니.
다른 부부들이 싸우면 낚시 좋아하는 남편에게는 낚시로 빗대어서 말하라고 조언까지 해준다.
길었던 부부싸움이 허무하게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컴퓨터와 헤드셋, 게임용 키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의 신혼생활은 언제 밧줄에서 떨어질까 지켜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한 외줄타기와도 같았다.
내면의 상처를 직면하고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없애려고 노력했던 시간들.
MBTI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려고도 했고, 전문가의 책과 영상을 보며 애썼던 순간들.
그 모든 게 모여서 끝이 날 수 있었다.
더 늦게 끝날 수도 있었고, 다른 끝으로 결말지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엔딩.
다행히, 해피엔딩이다.
찌개나라에서 떡볶이왕자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찌개공주 떡볶이왕자'가 아니라 '찌개나라 떡볶이왕자'인 이유가 있다.
사랑이 절정으로 무르익었을 때였다.
문득, 남편을 아무리 사랑해도 난 남편과 24시간 365일 함께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난 너고, 넌 나지만 우린 엄연히 다른 몸뚱이의 '타인'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내가 있어야 남편도 있고, 내가 있어야 세상도 존재한다는 걸 가슴속에 깊이 품게 되었다.
남편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내가 '잘'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먼저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더 사랑하기 위하여 더 사랑받기 위하여.
전쟁이 끝난 우리 부부의 식탁에는 찌개와 떡볶이가 번갈아가며 올라온다. 사랑을 담은 눈 맞춤은 필수.
떡볶이에 튀김이 빠지면 섭섭하듯이 빼먹지 않고 매일 물어보는 남편.
"자기야, 오늘은 무슨 이야기 하고 싶어?"
남편이 이 글을 쓴다면 '떡볶이왕국 찌개공주'가 되겠지.
지금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이 한 부부를 살렸습니다.
오늘도 마음껏 사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