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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만에 차린 남편 생일상

미역국 정말로 안 끓여도 돼?

by 여름옥수수 Feb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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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부부상담은 큰 변화를 주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삐걱거린다.

다만,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뿐.

곧 있으면 남편 생일이라 먹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었다. 남편은 머뭇머뭇한다.

작년 생일에는 버섯 크림 리소토와 뱅쇼로 저녁을 하고 간단히 케이크를 먹었다.

미역국이 없었던 건 남편이 '제발' 끓이지 말라고 해서였다. 미역국이 없어 허전했지만 국 하나에 뭐 이렇게까지 진심인지 그냥 끄덕였다.

리소토와 뱅쇼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퉁쳤던 것도 안 되겠나 보다. 남편은 결국 입을 열었다. 마음을 거절하는 게 미안해서 망설였지만 미역국은 끓이지 말라고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한다. 뭔가 반전이었다. 생일 주인공인 사람이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그게 생일이 아니냐고.

우리 부부의 예민한 밥 얘기에 또 한 번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래서 뭐가 먹고 싶어?"


나 진짜로 치킨, 피자, 떡볶이

당사자가 돼보면 참 웃음이 안 난다. 저 패스트푸드가 뭐길래 이렇게 심각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허우적대는 우리 부부의 현주소. 떡볶이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생일에도 먹고 싶은 정도로 좋아하는지는 또 몰랐네.

미역국은 그냥 생일이니까 먹는 음식이라는 게 내 머릿속에는 공식처럼 존재했는데 남편은 아니었나 보다. 남편이 진짜 미역국을 안 좋아해서인지 번거롭다고 느껴져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중요한 건 생일에 배달음식이라는 새로운 공식부터 받아들여야 했다.

낯설다. 익숙하지 않다.

생일상은 미역국과 잡채, 갈비찜 같은 음식이 무조건 반사다. 간소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음식이 올라가는 제사상. 친정이나 시댁에 가서 외식을 하거나 시켜먹고 오는 날이면 밥 한 끼도 못 차려줬다고 미안해하시는 엄마와 어머니.

이 모든 밥상의 공통점은 '정성'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남편의 시선에서 보니 '번거로움'이었다.


배달음식은 누군가의 정성을 돈으로 사서 번거로움이라고 느끼지 않는 걸까?

편한 게 익숙하지 않은 내가 이상한가?

'남편 생일상'을 검색해봤다.

미역국은 기본이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차려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정성과 사랑을 담아 차린 남편 생일상을 너도나도 자랑하고 있는 인터넷 세상. 나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어떤 연예인의 남편이 결혼 10년 만에 아내 생일상을 차려준 것은 놀랍고 감동적인 내용이라 기사화가 되고 있었다. 모두 내편이었다.

그럼 뭐해. 내가 남편과 사는 세상. 나에게 전부인 이 세상에서는 생일에 미역국을 먹을지 말지가 중요한 토론거리인데.


고양이, 누워있기, 게임


남편은 이렇게 세 단어로 설명이 된다.

누워서 귀여운 고양이들을 보거나 게임하거나. 고향 친구들 4명과 가장 친한데 물리적 거리도 있지만 게임하면서 만나도 충분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막상 만나면 좋지만 만나기 귀찮은 게 훨씬 크다.

아무거나 좋고 무난한 하루가 최고의 하루인 나의 남편은 매일이 보통날이다.

코로나 블루(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인 것 같다고 투정 부리는 내게 본인은 언제나 코로나 상황과 다름없는 생활이었다고 말해 폭소하게 만들었던 남편은 그랬다.

생일도 별다를 거 없이 흘러가면 되는 날들 중 하루였다.


선물 받은 청귤청으로 차를 마시다가 역시 탄산수와 소주와 타 마시길 잘했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취기가 올라오며 뭐라도 깨달은 걸까.

작년에 리소토와 뱅쇼로 남편 생일을 보낸 건 순전히 내 만족이었구나 알아차렸다. 민망함에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생일 주인공을 위한 생일상이 아니라 정성 들여 차려줬다는 내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나를 위한 남편 생일상. 같은 해 내 생일엔 미역국과 두부조림, 호박전 깻잎전까지 한 상 차려줬던 남편.

난 언제까지 남편을 모를까.

미안했다. 미역국은 생각에서도 치워버렸다. 남편이 진짜 좋아하는 Best 3 음식. 치킨 피자 떡볶이를 시켜 먹기로 했다.


엄마가 사위 첫 생일인데 뭐 차려줄까?


기껏 우리 둘이 합의를 했는데 위험상황이 닥쳤다.

우리가 이렇게 밥 때문에 싸우는 것부터 말해야 할지, 배달음식을 진짜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진심이 전달되게 얘기할 방법을 찾을지 아 어떡하지. 엄마가 몇 번을 묻는다.

우리 큰 사위 결혼하고 첫 생일인데 뭐 먹고 싶냐며 엄마 집으로 오라며 약간은 들뜬 목소리.

갈비찜이 먹고 싶은지 잡채는 좋아하는지 알려달라고 하는 엄마의 연락에 남편에게 그냥 미역국 갈비찜 잡채 고고할까 눈빛을 보냈다. 남편은 척하면 척.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장모님 마음도 자기 마음도 정말 알겠어. 그래서 고맙고 감사해. 그런데 나는 생일이라고 누군가 번거롭게 음식 해주고 그러지 않아도 그 마음을 이미 아니까 정말 수고스럽게 안 해주셔도 되는 거거든. 배달음식을 먹어도 행복한 게 사실이야. 자기가 장모님께 잘 말씀드려줄래?"


생일에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구절판을 외쳤던 나. 잘못된 건 아닌데 부끄러웠다.

전통방식에서 약간 변형해서 먹는 우리 집 구절판은 밀전병 대신 무쌈에 싸 먹었다. 계란 지단, 소고기, 오이, 당근 볶음, 게맛살, 무순, 버섯볶음, 파프리카를 소스에 찍어서 무쌈에 싸 먹는 내 생일파티 음식은 매년 같았다. 내가 하려면 하루 종일 걸리는 귀찮기도 한 음식.

엄마에게 '잘' 말한 덕분에 엄마도 어색하지만 알겠다고 했다.

고르는데 5분, 배달 기다리는데 20분, 접시에 담아 옮기는데 5분. 30분이면 완성되는 근사한 남편의 생일상.

엄마는 미안해하면서도 편하다고 했고, 미안해하면서도 시대가 좋아져서 호강한다면서 웃어 보였다.


치킨, 피자, 떡볶이가 펼쳐진 생일상을 직접 보고 있으니 낯설지가 않았다. 익숙했다.

초등학생일 때 생일파티를 한다고 친구들을 초대해놓고 차렸던 나의 생일상과 똑같이 닮아있었다.

거의 20년 전이니까 시켜먹는 것이 이벤트였던 시대. 배달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떠올리기만 해도 입이 귀에 걸리는 소중한 추억. MSG처럼 강렬하고 짜릿해 잊을 수 없었다.

패스트푸드는 나쁜 음식이라고 생일에만 먹게 해 준 음식들은 마치 다이어트의 치팅데이 같았다.

아, 그렇구나.


남편 생일상은
다이어터 남편의 치팅데이구나


처음에는 생일상도 배달시켜먹자는 남편이 정말 이해가 안 갔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생각을 찾아다니며 아군을 만들기에 급급하기도 했다가 속상해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고민했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똑같은 하루 속에서 안정과 행복을 느끼는 남편의 성향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고, 음식으로 정성을 먹여주지 않아도 마음으로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남편에게 오히려 한 수 배운 느낌이었다.

매일 다이어트를 하는 남편에게는 어차피 먹을 거면 먹고 싶은 떡볶이를 먹는 게 가장 만족스러울 생일이었겠구나. 남편은 생일이 치팅데이일 수 있겠구나.


설날에 만난 아빠는 건강하고 행복한지 한시간 내내 물어보셨다.

엄마와 어머니는 진수성찬을 차려주시고도 차린 게 없다며 미안해하셨다.

시할아버지는 우리가 끓여드린 떡국을 맛있게 드셨지만 솥에 달라붙은 떡 때문에 뒷일이 많다고 다음부터는 먹지 말자고 하셨다.

각자의 예쁜 마음은 모양이 달라서 한 번에 섞이지 않는다. 차차 자신의 속도대로 스며들게 된다.

남편과 가족이 되어가는 진통은 고통이었지만 우리는 한 번에 섞일 수 없는 게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남편과 '가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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