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을 사랑하고 16년을 미워하며 깨달은 것은
어떤 부모가 이혼했다고 딸 결혼식에 오지 않는가.
끝내 아빠는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결혼식 전날은 내 마음 같았다.
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비바람이 몰아쳤고 걱정으로 밤을 꼴딱 새웠다.
하늘이 달래주기라도 하듯 기적처럼 하루 새 맑게 개었다. 야외 결혼식을 택한 우리 부부는 안도했다. 오히려 전 날 온 비 덕분에 흙먼지는 가라앉고 잔디는 더욱 푸르렀다.
결혼식 주인공도 하객들도 모두가 들뜨는 화창한 날씨였다. 마음이 솜사탕처럼 달달한 봄날. 완벽한 결혼식. 그 속에는 없던 나의 아버지.
아빠가 몸이 불구라도
그 자리에 앉아주길 바랬다
결혼식마저 상처를 주는 못난 아빠.
엄마를 보는 게 힘들어서 못 간다는 세상 이기적인 아빠.
동생들에게도 미리 못 간다고 말하는 뻔뻔한 아빠.
그런데도 결혼해서 잘 살라고 축하한다는 아빠.
그게 내가 사랑하는 아빠라는 사실이 괴로운 나.
16살 때까지는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화목한 줄 알았다. 아빠는 열심히 일하셨고 엄마는 성실히 밥상을 차리셨다. 매년 놀이동산 연간 회원권을 끊어서 놀러 다닐만큼 물질도 사랑도 부족함이 없었다.
다정한 아빠와 따뜻한 엄마 밑에서 행복해야만 하는 건데 이상하다. 좀 찝찝했다.
하하호호 웃음소리에도 정작 엄마 아빠는 메말라 보였다. 서로를 바라보지도, 웃음 짓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의 연기가 들통났다
중학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엄마, 아빠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식들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머리가 크니까 아빠의 고지식한 사고방식에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껴 반항했고, 매일 같이 첨예하게 부딪혔다. 큰 딸과 아빠의 싸움. 이 작은 불씨가 번져 엄마 아빠도 더 이상의 연기가 불가능해졌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 부서지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부서졌다.
외벌이였던 아빠. 전업주부였던 엄마. 가난보다 아빠가 무서워서 우리는 엄마와 살기로 했다. 아빠의 빈자리를 미움과 원망으로 채우다 보니 느리게 가던 시간도 잘 흘러가는 듯했다.
대학생이 되었고, 수업이 없던 날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고 세상이 떠들썩한 날이기도 했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스티브 잡스를 끊임없는 변화의 결단으로 이끌었다는 기사를 봤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갑자기 아빠를 안 보면 후회할 것 같았다. 곧장 신문을 덮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6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익숙한 숨소리와 말투. 아빠는 내 전화를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했다. 서로를 원망하며 그리워했던 부녀.
일단 만나기로 했다. 장소를 정하던 중 아빠는 뜬금없는 곳을 말했다.
국가나 사회를 위해 희생, 공헌하신 분들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장소 국립대전현충원.
큰아빠가 안치되어 계시는 곳인 건 알지만, 몇 년 만에 얼굴 보는 장소로서는 생뚱맞다고 느껴졌다.
어릴 때 매년 갔지만 동생들과 마냥 뛰놀 수 있어서 좋았던 곳. 그곳에서 엄마랑 아빠도 사랑하는 것 같다고 느낀 유일한 한 장면을 선물 받은 곳.
그 정도의 추억이 있는 게 전부였다.
이유가 있겠지 하고 큰아빠 묘비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 순간, 충격적인 숫자를 봤다.
큰아빠의 사망일과 내 생일이 같았다
내가 태어나기 7년 전 군대에서 돌아가신 큰아빠. 산비탈을 운전하던 중에 차가 굴러 전복된 사고였다.
큰 아빠의 사망일인 '몇 월 며칠'은 내 생일 네 글자와 같았다.
어릴 때도 말해줬다고 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아빠는 말했다.
"네가 태어난 날, 아빠는 정말 기뻤단다."
"어땠는데?"
"눈이 어찌나 크던지 때롱때롱 쳐다봐서 네 별명을 때롱이라고 지었잖아."
"그래도 내가 이제 성인인데 때롱이라고 부르는 건 좀 자제해줘."
"허허 그래. 너의 생일이 이제 보니 신기하지? 1년 365일 수많은 날들 중에 형님이 돌아가신 날과 네가 태어난 날이 같은 것을 보고 아빠도 좀 놀라웠단다. 아빠는 형이 하늘에서 보내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빠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아빠에게 선물 같은 존재였구나.
내가 사랑했던 아빠는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이후 아빠를 만나 못다 한 투정도 부리고 미워하는 마음도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자식들이 보고 싶어서 노래방에서 시끄러운 노래를 틀고 펑펑 울었다는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미어졌다가도 경제력을 무기로 내세우며 유치한 모습을 보일 때면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아빠가 불쌍했다가 아빠에 분노했다가 애증 사이에서 뱅뱅뱅.
촘촘히 미워했던 16년이 지나 32살이 되었다. 좋은 짝을 만난 것은 축하한다면서도 결혼식에는 못 간다고 말하는 아빠. 상상 그 이상이었다. 미워할 만큼 미워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미워해야하는구나. 처참했다.
평생 안 보고 살 거라고 다짐했건만, 남편과 밥으로 싸울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처럼 한식을 즐겨 먹지 않는 남편. 아빠처럼 천천히 이야기 나누면서 먹지 않는 남편.
애증의 쳇바퀴는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떡볶이와 라면을 먹으면 헛헛해했던 아빠. 밥과 국에 다양한 반찬이어야만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던 아빠. 밥 먹으면서 했던 잔소리가 참 따뜻했던 기억.
아, 그 기억은 나만 따뜻했던 것 같다. 동생들은 밥 먹으면서 잔소리하는 것까지 아빠를 닮았다고 한다.
식성뿐만 아니라 취향과 성격까지 유전자 몰빵. 야속해도 어쩌겠나. 남들과도 공통점이 하나 있으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데. 나를 닮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나의 생존에 불리했다.
친구에게 부부상담받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밥 때문에 남편과 자주 싸워서 갔지만 돌아온 답은 밥이 문제가 아니었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부모의 이혼에 대한 피해의식, 원망, 분노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난 뭐 그렇게 16년째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건지 뭐 그렇게 복잡한건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눈빛만 봐도 통하는 친구. 어떨 때는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아는 친구는 말했다.
"피해의식이라는 단어를 좀 예쁜 말로 바꿔보면 어때?"
예를 들면, 사랑 같은 거
16년을 사랑했고 16년을 미워했다. 아니 계속 사랑이었다.
미움과 증오, 원망. 이 모든 게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피부로 깨닫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아빠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해가 된다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엄마 아빠의 사랑도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는지, 중간부터 아니었는지, 어디부터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로를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그뿐이다.
남편과 다투지 않기 위해서 아빠랑 다투지 않기로 했다.
남편을 잘 사랑하고 싶어서 아빠를 사랑하기로 했다.
이번 설날에는 아빠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