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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은 다 부모 탓이래

부부상담은 처음입니다만

by 여름옥수수 Jan 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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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부부상담을 받고 왔다.

그만큼 급하고 절실했다.

희망과 설렘을 느낀 동시에 패배감도 밀려왔다.

‘신혼생활은 알콩달콩 깨 볶기에도 부족한 거 아닌가?’

‘우리만 문제 있는 부부인가?’

묘한 쓰라림을 그냥 받아들였다.

그래도 우리 관계를 개선할 수만 있다면!

남편과 손을 꼭 잡고 캐럴이 울려 퍼지는 거리를 지나 상담실로 향했다.

한 타임에 50분. 우리를 설명하기만 하다가 끝날 것 같아서 두 타임을 연달아 예약했다.


밥 문제 때문에 왔다고요?


상담사는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평범하고 사소해서 어디서도 속 시원히 말하기 어려웠던 '밥 문제'

우리 부부에게는 매 끼니마다 눈치게임을 불러일으키는 심각한 ‘밥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혼자 편하게 라면 끓여 먹고 싶은 남편 vs 요리해서 같이 이야기 나누며 먹고 싶은 아내

매일 다이어트하는 남편 vs 주말에라도 같이 먹자는 아내

변해버린 남편 vs 집착하는 아내

.

.

.

남편의 아버지 vs 아내의 어머니


심리학은 다 부모 탓이다


성장과정에서 문제를 찾고, 상처받은 어린 시절의 나를 보듬고 안아주는 일.

중학생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다섯 번 정도 상담을 받으며 알게 된 루틴이다.

큰 울림이 있었던 한 번의 상담 덕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기도 했지만, 내 마음속 어린 소녀는 상처를 깊게 받았었나 보다. 아무리 토닥여도 엄마를 원망하고 아빠를 증오하는 시간은 남아있었다.

심리학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심리학은 다 부모 탓이라고 했다.


바꿀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나, 바꿀 수 없는 부모.

살아야 하니까 받아들여라. 잘 살아야 하니까 나를 바꿔라. 상처를 어루만지고 딛고 일어나라.

부부상담에서도 여전히 심리학은 부모 탓이었다.

파고들다 보니 남편의 원가족과 나의 원가족에서 파생한 문제의 충돌.

밥 문제로 드러난 것뿐이지 우리 부부의 진짜 문제.


우리 부부는 이혼가정에서 자랐다.

우리 부부는 비슷한 시기, 중학생 때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다.

남편은 동생과 아버지 밑에서, 나는 동생 두 명과 어머니 밑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남편의 아버지는 최대한 간섭 없이 양육하셨고, 나의 어머니는 최대한 밀착하여 양육하셨다.

남편은 그렇게 혼자, 알아서 차려먹게 되었고

나는 아버지랑 살 때의 12첩 반상에서 크게 달라진 점을 느끼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빈자리를
밥상으로 채우려 하셨다

16년 간 나의 밥상은 항상 따뜻하고 화목했다.

자상하게 생선가시를 발라주던 아버지와 단 한 번도 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게 한 적이 없던 어머니의 부지런한 밥상.

깨질 것 같지 않던 우리 가족.

그러나 오후 4시만 되면 앞치마를 두르고 삼 남매의 간식을 챙겨주던 전업주부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밥상뿐이기에 매일 같이 진수성찬을 차렸다는 어머니.

살아야 하기에 먹었고 살고 싶어서 우리는 밥상 앞에 모였다.

수많은 눈물과 허기진 외로움이 밥상을 뒤덮어도 우리는 같이 앉아 밥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토닥였다.

그렇게 그 시간을 지내온 것이었다.


그렇게 그 시간을 견뎌낸 것이었다


남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심한 간섭을 받으셨다.

자식 잘 되라고 하는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웠던 옛날 시대의 흔한 양육방식.

그래서 간섭 없이 남편과 동생을 키우셨다.

자식들을 기다려주고 믿어준 것은 오히려 남편을 화나고 답답하게 했다. 사회적으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을 미처 배우지 못한 것 같아 돌아보니 원망스럽다고.


상담사는 남편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고 맨날 혼자 편하게 라면 끓여 먹어요?"

"아내가 저런 식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주말만은 기필코 시간을 보낸다던지 해야지. 아내가 밥 먹자는 게 아니라 외롭다잖아."


상담사는 내게 말했다.

"요즘 같이 바쁜 시대에 그렇게 밥 먹고 커피 마시고 길게 대화 나누는 게 특이한 거 아닌가요?"

"남편이 체중조절을 하면 주말에 하루 정도 같이 먹으면서 맞춰가야지, 금토일 몽땅 다 먹자고 했어요?"


팩폭(팩트폭격)에 가까운 상담사의 조언과 충고는 신기하게 맞고 싶은 매질이었다.

'더 채찍질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이상한 쾌감이었다.

그렇다. 심리학은 여전히 부모 탓이었지만 또 한 번 나를 잡아주었다.

믿는 지인의 추천이었고, 부부상담은 처음이었고, 유료상담은 처음이었으니까.


사실, 한 마디로 말하면
또 한 번 믿고 싶었으니까


간섭 없이 자라서 기준과 중심이 필요한 남편.

혼자 먹고 혼자 쉬는 게 익숙했던 남편은 급속도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갔던 것뿐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외로웠지만 아직 부모의 이혼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슬픔 등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있어서 남편을 여유롭게 기다려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한껏 눈물을 쏟아내고 상담실을 나왔다.

후련하기보다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막막했다.

남편과 싸울 때면 우리 부모님의 갈등 해결 방식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했는데, 별로 좋지 않았다.

반면교사 삼고 좋은 방식을 배우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처럼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남편과 뿔테 안경을 구경했다.

남편은 안경도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나의 입이 자꾸 씰룩거렸다.

순간, 이렇게 맑고 좋은 사람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건 결국 남편의 부모님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부족한 것 투성이어도 나는 내가 참 좋은데, 이런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것도 역시 우리 부모님이었다.

우리는 원망하고 미워해보니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식들을 키워내셨다는 것을..

남편과 나는 그렇게 상대방의 부모님과 포개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떡볶이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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