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는 진실
밥 먹는 것 때문에 난 남편과 헤어짐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떠올라버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수많은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결혼식이 생각났지만 외면했다.
달콤할 것만 같았던 신혼 8개월 차에 밥으로 이렇게까지 살벌하다는 게 믿어질지 모르겠다.
퇴근하고 맛있는 걸 먹으며 맥주도 한잔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은 나와
쉬다가 배가 안고프면 그냥 자고, 배고프면 그때 먹던지 결정하고 싶은 남편.
우리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반복되던 어느 날이었다. 유독 특별한 날에 싸우게 되는 커플의 법칙을 알고 있는가?
사건 발생 당일은 우리 부부에게 기념과도 같은 날이었다.
생애 첫 강연을 대학 강단에서 하게 된 나와 모델 경력이 전무한 남편이 일반인 모델일에 합격하게 된 것.
이 날을 준비하기 위해 남편의 다이어트는 더욱 지독해졌다.
한 달 동안 1일 1식도 힘든데, 그 한 끼는 무한반복 샐러드. 적어도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일어난 적도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이 또한 신선한 첫 경험이었다.
의외로 남편의 강도 높은 다이어트는 우리 집에 평화를 가져왔다.
남편이 외적으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지원해준 모델 일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될까? 되다니!' 게임을 좋아한다.
내가 인생에서 도전했던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든 '될까?' 게임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3시간 동안 초집중해서 만든 PPT로 두 군데를 지원했는데 한 군데에 합격했다. 된 것이다!
나는 방방 뛰며 기뻐했지만 모델님은 여느 때처럼 누워서 한 마디 한다.
"자기 개쩐다"
그랬으니 오히려 다이어트 하라며 부추기고, 나 혼자 먹는 밥도 그리 즐거웠던 것이다.
첫 강연을 무사히 끝내고 모델 일을 마친 남편과 통화했다.
저녁에 뭐 먹고 싶냐고 먼저 물어보는 남편.
감격하기 이전에, 모델 일과 상관없이 매일 다이어트를 하는 남편이니까 '오늘 저녁을 먹을 것인지'를 물었다. 같이 맛있는 거 먹자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남편.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편이 집에 오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물었다.
저녁 뭐 먹을까? 우리 축하파티 해야지!
몇 번을 물어도 남편은 모르겠다고 한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만나서 먹은 음식이 100개라면 그중에 99.9개를 선택한 것은 나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늘 선택이 어렵다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먹고 싶은 것을 함께 먹는 게 그저 좋다고 했다.
매일 먹고 싶은 것이 넘쳐나는 나와 남편의 식사 패턴은 환상의 궁합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기분은 매일 다른 거라 믿기에 기념일과 같은 날에는 의사를 꼭 물어봤다.
그래서 기다렸다. 답이 계속 없다.
평소에 하던 대로 이것저것 메뉴를 제안했다. 김치찜? 곱창? 차돌 된장찌개?
영 시큰둥하다.
내가 메뉴를 제안하면 OK 하던 평소 패턴도 삐걱거렸다.
하필, 화장실 수압이 약해져서 샤워하기가 많이 불편해졌고 손보다 보니 어느새 8시가 넘었다.
배달시켜 먹으려다가 더 기다리기 힘들 것 같아 물었다.
"그냥 나가서 먹을까?"
"나가게?"
귀찮고 피곤해 보인다. 한 발짝 포기.
"그럼 뭐 시킬까? 닭도리탕? 아니면 자기 뭐 먹고 싶어?"
각자 먹고 싶은 거 시켜서
각자 먹는 게 어때?
쿵.
서운함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각자? 각자라고 했니.
그래, 남편은 떡볶이가 먹고 싶었던 것이다.
아재 입맛인 나와 초딩입맛인 남편의 취향은 교집합이 없다. 타협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찌개도 시키고 떡볶이도 시켜서 같이 축하 파티하는 기분으로 먹는 건 어떠냐고 말해줄 수는 없었을까?
평소에 그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인데.. 너무 속상했다.
우리의 모든 식사에서 선택만 내가 했을 뿐, 남편의 최애 메뉴를 적절히 섞어가며 선택했었다.
남편이 오늘은 돈가스인 것 같다, 오늘은 초밥이구나.
완벽한 착각이었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남편을 1도 배려 안 하는 똥멍청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기념일에는 각자의 기대치가 평소보다 매우 상승하여 싸움을 일으키는 법칙이 존재한다.
이 법칙은 어디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커플들의 관계 속에서는 살아 숨 쉬고 있다.
한 달 동안 제일 고생한 게 남편인데 최애 메뉴 정도는 눈치껏 알아차렸어야 했다.
하지만 이 법칙 앞에서 오직 나의 보상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제발, 절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힘을 냈다.
"그럼 자기 먹고 싶은 거 먹자. 내가 떡볶이 시킬게! 어때?"
그냥 안 먹을래
어렵게 던진 제안에 너무 쉽게 답을 받아버린 느낌.
매일 부딪혔던 밥과의 전쟁에서 겨우 겨우 지켜내고 있던 나의 성벽이 와르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
또 반복이구나.
내 마음 여기저기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안 먹겠다고 한 이유는 있었다.
다투다 보니 어느새 9시가 넘어간다. 늦은 시간에 먹으면 살이 찌는데 내 돈과 시간을 써가며까지 살찌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남편은 나와 다르게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권유조차 안 한다.
끊임없이 같이 저녁을 먹고 싶어 하는 내가 부끄럽지만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내가 떡볶이를 안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아는데 억지로 먹으려고 하니까 그것도 불편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는 남편도 나도 각자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밉기만 한 남편. 미워 죽겠는 남편.
요리하는 게 싫다고 해서 요리까지 바라지도 않잖아. 그냥 먹어주는 것도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접시에 담아 예쁘게 차려먹는 집밥의 기준에서 배달음식과 인스턴트, 편의점 음식까지 섭렵한 거면 나도 많이 노력한 것 같은데.
더군다나 오늘은 우리 인생에서 뜻깊은 날이라 케이크에 꽃다발에 풍선까지 달아서 파티하고 싶었던 맘 꾹꾹 누르고 배달음식으로 퉁 친 것도 내 마음은 많이 양보한 것인데..
도대체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점점 지쳐만 간다.
눈물 콧물 싸우다가 결국에는 쫄쫄 굶고 잠자리에 들었다.
꼬르르륵. 배고프니 더 화가 난다.
평균 수면시간 10시간인 내가 잠도 안 온다. 배고파서인지 서러워서인지 꼬르륵 소리는 멈출 줄 모르고 그렇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어느덧 눈물로 베개가 적셔졌고, 처음으로 이 결혼에 자신이 없어졌다.
연애할 땐 '헤어지고 싶다'였는데 결혼하니까 무게감은 상당했다. 어쨌든 같은 이별이겠지.
나도 모르게 우리의 끝을 상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