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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갑질하는 아내입니다

가정 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

by 여름옥수수 Feb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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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선생님'이라는 이유만으로 갑질을 했던 몇몇을 기억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기 직전, 회사에서 반쯤 미쳐서 뛰쳐나온 기억도 잊지 않고 있다.

갑질을 당했던 아픈 기억은 이렇게 생생히 간직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에게는 갑질을 멈추지 않고 있는 나는, 갑질하는 아내이다.


대학교 선후배 사이인 남편과 나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선배=갑, 후배=을로서 관계 맺음이 자연스러웠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 4학년 마지막 여름방학에 참여하게 된 필리핀 어학연수 한 달.

그때 만난 1학년 남편은 그저 귀여운 신입생이었다.

어학연수 한 달 동안 별다른 교류도 없었고 이후에도 한두 번 밥 먹은 것이 전부였다.

매년 내 생일에 연락을 주는 고마운 후배 정도로 기억했는데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감히 좋아할 수 없는 사람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서도 군대 갈 때 내 번호를 적어서 갔다고 했다.

꼬깃꼬깃 종이를 펼치며 용기 내서 전화했을 텐데 나는 그 통화마저도 간신히 기억해냈다.

남편은 나를 선망의 대상,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선배로 여겨서 다가갈 생각조차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확 당겼다.


남편이 졸업할 때쯤이었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남편은 제법 '남자'로 보였다.

고백을 유도한 건 나였지만 기다렸다는 듯 덥석 물었던 후배.

썸이라고 할 것도 없이 두 번 만나고 고백해온 그는 불도저 연하남이었다.

알겠다고 사귀자고 하니 감격스러워하며 눈물을 그렁그렁 보였던 그와,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누나 결혼식에 꼭 초대받고 싶었어요


결혼식을 앞두고 정신없던 날이었다.

남편은 다른 시간 속에 있는 사람처럼 조용조용 읊조리듯 말하였다.

"자기 결혼식에 꼭 초대받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감격스러워?"

"그러네"

"초대받았잖아. 그것도 남편으로! 성공했네?"

"헤헤 그러네"


남편은 자다가 내가 뒤척이기만 해도 어디가 불편한지 걱정돼서 깰 만큼 온 신경이 내게 있었다.

눈빛만 봐도 내가 배고픈지, 피곤한지, 행복한지 알아차리는 능력은 나날이 발전해갔다.

누가 봐도 슈퍼 갑은 나였고, 나의 갑질은 당연했다.

남편은 원래부터 자존심 같은 건 없는 사람 같았다.


나 싫어?


남편은 연애 초반부터 끊임없이 물었다.

같이 살게 되면 좀 괜찮아지려나 싶었지만, 동거한 1년 반 동안도 멈추지 않았다.

"나 싫어?"라는 질문은 계속됐고 나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해서 기분이 좋았다. 조그마한 것도 신경 쓰는 세심한 성격이라 여겼다.

그러다 부정어인 게 걸려서 차라리 "나 좋아?"라고 긍정어로 바꿔서 물어보라고도 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얼마 못 가 억울하다고 화를 냈다.

누가 보면 나는 상대방 존중할 줄도 모르고 남편에게 '갑질'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다고 그렇게 물어보지 말라고.


들키기 싫었던 내 마음.

대놓고 '갑질'하는 슈퍼 갑 말고, 근소한 차이로 남편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는 갑이 되고 싶었다.

남편이 항상 조금이라도 나를 더 좋아해서 내가 갑인 관계.

갑인 아내는 언제나 을인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하지만 마음의 크기를 따라잡을 수 없어 내가 갑인 관계.


엄마는 남편에게 절대 참지 말라고 했다


나의 마음을 이해해준 을은 그 이후로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부작용이 생겼다. 남편이 나의 절대적인 위치 '갑'의 자리를 위협했다.

남편과 친정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엄마가 나의 앞담화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잔소리가 많아서 동생들도 고개를 절레절레한다며, 예민한 나를 맞춰주느라 고생이 많다고 했다. 장모로서 당부하는데 다 맞춰주고 절대 참지 말라고 했다. 참으면 병 된다고.

남편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해서는 집에 돌아왔다.

갑자기 큰 결심을 한 듯 할 말은 하겠다고 해서 어이가 없었지만 내심 반갑기도 했다.


200% 맞춰주는 남편에게 익숙해지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저 사람도 감정이 있을 텐데 뭔가 건강한 방향 같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핸들을 꺾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을 때도, 가고 싶은 곳을 갈 때도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찜찜했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도 다 맞춰주고 화도 안 내니 언젠가 폭탄이 터질 것처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 말은 하겠다 그 말이 참 반가웠던 것이다. 이후로 본인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남편.


을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옹알이를 시작하듯 점차 '말'을 했다.

누워있는 것을 좋아하고, 핸드폰 보면서 쉬면 충전된다고 했다.

술은 쓰디쓴 액체일 뿐이고, 게임하는 것이 자기에겐 유흥이라고 했다.

그리고 떡볶이를 좋아한다고 했다.

하하. 건강한 방향이 맞았다. 서로의 취향과 습관,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를 알아가는 진정한 관계의 시작이랄까. 그런 것이 시작된 것 같았다. 비단 엄마가 말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우리 관계에 찾아왔어야 하는 시작이 맞았다.


권력의 달콤함이 이런 것일까?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올라가면서 겪는 행복감보다 추락할 때의 절망감이 더 치명적이라고 하던데.

흔들리는 갑의 위치만큼이나 나의 정신상태가 마구 흔들렸다.

많이 컸다 남편? 적당히 해.

후. 아니지. 나도 좀 괜찮은 아내,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지.

억지로 미소 지으며 애써 괜찮은 척 받아들이며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었다는 뿌듯함으로 위로하며 견뎌냈다.


남편과 밥으로 싸우는 문제가 점점 심각해져 갈 때 여동생을 찾아갔다.

동생은 별로 듣지도 않고 형부에게 갑질 좀 그만하라고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1시간 동안 밥 먹는 언니 앞에 앉아 있어 주고 같이 얘기해 준 걸 몰랐냐며, 내가 언니를 잘못 키웠다고 했다. 떡볶이가 얼마나 맛있는데 맨날 밥타령을 하냐고 폭풍 잔소리. 

매일 배달 음식 시켜 먹어도 질리지 않는 여동생을 찾아가 고민 상담한 내 잘못이지.

그래도 가족들의 도움(?)으로 나는 남편과 엇비슷한 갑을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갑질도 습관이다

완벽한 을이었던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변하니까 미치겠다고 남편을 붙잡고 엉엉.

이제라도 모든 걸 표현해줘서 고맙지만 내게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엉엉엉.

변해버린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세상 떠나갈 것처럼 울었다. 

갑질도 습관이었다. 죽을 만큼 노력해야 겨우 바뀔 수 있는 습관.

그래서 남편이 내가 좋아하는 찌개를 같이 안 먹어주는 게 그렇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갑 또는 을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형성되는 권력관계 속에서 누군가에겐 갑이 되고 누군가에겐 을이 된다.

자발적으로 을이 되고도 행복해하는 건 오직 '사랑'속에서만 가능하다.

좋아해, 사랑해라고 말하면 항상 내가 더 좋아해, 더더 사랑해라고 말해주는 남편.

언제나 본인이 을이라고 안심시켜주는 남편에게, 갑질 좀 적당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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