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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P 남편 ♥ ENFJ 아내

MBTI 궁합은 천생연분

by 여름옥수수 Feb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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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사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누워서 핸드폰으로 고양이를 보던 시간보다 MBTI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꾸 인스타그램에 본인 MBTI를 댓글로 태그 하더니 어떤 종류의 '요구'라는 것을 한 적이 없던 남편이 #isfp를 검색해보라고 한다.

부탁치고는 싱거웠지만 성실히 정독했다.

최근 유행하는 MBTI는 일종의 성격유형검사 도구이다. 무료인 데다 검사 시간도 짧다.

다양한 인간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눈 것도 흥미롭지만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가볍게 던져볼 수 있다. 나아가 타인을 탐색하는 데도 도움이 돼서 열기가 식지 않는 듯하다.

호기심 많은 예술가 유형으로 나온 ISFP(잇프피) 남편이 왜 내게 그런 요구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척추가 없는 수준으로 누워있다는 ISFP.

유튜브 + 떡볶이 = 극락이라는 ISFP.

고양이 집사이자 당신의 평범한 비서 ISFP.

약속이 취소되면 예의상 아쉬워하지만 속으로는 환호를 외친다는 ISFP.

이 정도면 ISFP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남편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MBTI 중독이라는 잇프피..


정의로운 사회운동가 유형으로 나온 ENFJ(엔프제) 나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핵인싸 ENFJ.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꿈을 이루며 선한 일을 통하여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독려한다. 그렇게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며 자부심과 행복을 느낀다는 ENFJ.

오지랖 넓고 말 많은 ENFJ.

글 쓰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ENFJ.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하고 있을 때 핸드폰에 알림이 하나 울렸다.


우리 부부의 MBTI 궁합은 천생연분


남편의 톡이었다. 스크린 캡처해서 보낸 MBTI 궁합 표.

천생연분, 좋은 관계, 무난한 관계, 최악의 궁합 네 개 중 최고의 궁합인 천생연분이라는 우리 부부.

ISFP 남편 ♥ ENFJ 아내. 이 가운데 하트가 맞다고?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데?

우리 관계는 안 맞기도 하고 잘 맞기도 하다는 줄글의 캡처 사진도 하나 더 보내왔다.

ENFJ가 좀 어른, 보호자스러운 역할을 스스로 한다고 생각하고, 아마 그렇게 관계가 짜여 있을 거라며 둘이 잘 맞는 건 그러한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흥미롭네. 계속 읽어 내려갔다.


'안 맞는 건 취향 문제인데, ENFJ는 ISFP에 비하면 세련됨은 떨어진다. ENFJ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마음을 열고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좀 배울 필요가 있다.

한편, ISFP는 ENFJ가 진지한 이야기할 때 귀에 안 들어오더라도 좀 반복해서라도 열심히 듣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아마 죽어도 ENFJ가 만족하는 수준으로 이해하지는 못 할 텐데,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로도 ENFJ는 만족한다.'

 

기가 막히네.

남편이 세련됐나? 아무튼 거의 다 맞는 말이었다.

이후에도 MBTI 중독 잇프피는 수많은 정보를 보내왔다. 기억에 남는 건 유재석이 잇프피고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가 엔프제라는 것. 유재석도 라면을 그렇게 좋아하던데. 잇프피 짤에는 떡볶이가 따라붙고 엔프제에는 찌개가 안 나오는 걸 보니 남편의 떡볶이 사랑에 대한 신빙성이 높아졌다.


돼지 MBTI를 아시나요?


음식에 진지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유행에 힘입어 돼지 유형 테스트, 돼지 MBTI라는 것도 있었다. 이것까지 잘 맞다니 남편 따라 MBTI 중독이 될 수밖에 없었다.

ISFP 남편은 '소확행 만렙 돼지'

밖에서는 사람들과 잘 먹고 잘 놀고, 집에서는 뒹굴대면서 배달음식 시켜먹는 게 행복. 식사 문제로 예민할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전원적인 생활을 꿈꾸면서도 문명을 잘 이용하는 타입. 이들이 있는 곳은 집과 친구들이 고른 식당이라고 했다. 이거 또 남편 얘기네.

ENFJ인 나는 '좋은 게 좋은 모임 왕 돼지'

모임 좋아! 파티 여는 건 더 좋아! 술자리를 좋아하는 건 먹고 죽자가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영감을 얻어서라고 했다. 이들이 있는 곳은 펍이나 와인바. 거부할 수 없는 내 얘기였다.


우리 부부가 MBTI에 빠지게 된 것은 MZ세대라서가 아니다.

한 번은 매일 다이어트를 하는 남편에게 회사 점심을 굶고서라도 나랑 저녁을 먹자고 말했었다. 부부가 저녁 먹으면서 하루를 정리하는 게 당연하다고 밀어붙였다. 얼토당토않은 걸 알지만 당연하게도 내뱉었던 말. 우리에게 플랜 B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빙판을 달리는 스케이트 날처럼 날카로운 말들이 오갔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점점 감정이 격해졌다. 남편을 괴롭히기는 싫은데 나 스스로 통제가 안되고 처리가 어려운 이 서러움과 답답함. 좀 해결해달라고 남편에게 소리쳤던 날이었다.

그 이후였던 것 같다. 남편은 자꾸 MBTI를 통해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남편이 수줍게 고백했던 말들

상념에 잠겨 있다가 발견한 책장 속 에세이 한 권.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현하고 싶지만 표현이 잘 안돼서 어렵다고 했던 연애 시절. 매일 달달함이 한도 초과였던 날들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대필해준 것 같다며 남편이 수줍게 건넸던 책이었다.

특히 공감 가는 페이지에 연필로 하트를 그려서 줬는데, 가끔 꺼내어 하트가 많은 페이지를 찾는 건 손가락이 오그러 들었지만 설레는 일이었다. 꽤 오랜만에 펼쳐본 페이지들인데 친숙했다. 남편이 쓴 것처럼 착 달라붙는 남편의 언어들이었다.


감정표현에 서투른 ISFP 남편은 에세이 책에서 MBTI로 표현 수단만 바꿨던 것이었다. 세련되게.

행복한 기분도 부정적인 감정도 뱉어내는 데에 서툴렀던 남편은 그렇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본인은 이런 사람이라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표현이 잘 안돼서 그런 거라고. 어쩌면 너무 사랑해서 귀차니즘 잇프피인 내가 이렇게 캡처 캡처해서 부지런히도 말하는 거라고.


MBTI는 많은 사람들이 애정 한다. 이유도 그에 따른 해석도 각양각색이다.

서로를 바라보지만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이들.

서로를 향해 말하지만 튕겨져 나가 버리는 언어들.

서로를 원하지만 의도와 다르게 꼬여만 가는 관계들.

누구나 그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MBTI라는 도구로 대동단결된 것은 아닐까.

이게 바로 당신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무심히 툭. 그렇게 공유버튼을 누르는 건 아닐까.

증거가 참 따뜻하기도 하네.


옆에 누워서 MBTI를 보는 남편이 키득거리며 오늘도 심각하지 않게 사랑을 전달한다.

"ENFJ는 매일 정의를 위해 싸운대. 그러다 지치면 안 되는데.."

"자기가 같이 저녁 먹어주면 될 것 같은데? 나 부대찌개 땡겨"

"그래? 그럼 오늘은 그거 먹자"

아, 국물이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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