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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대디 Aug 03. 2021

생명을 다루는 법

작지만 중요한 변수들

몇 달 전 어린이집에서 놀던 어린이가 친구와 부딪쳐 넘어지면서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그 당시 어떻게 넘어졌는데 사망할 수가 있느냐 가지고 논쟁이 있었고, 어린이집의 가혹행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커져가기도 했다. 조사 결과 아이가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는 2차 피해가 발생하는 바람에 사망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사고라는 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많은 사고 중에 상당 부분은 사소하게 무시해 왔던 작은 실수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대단히 많다.


예전에 최철호 목사님 강의 중에 떠오르는 내용이 있다. “물질을 다루는 데 있어서 발생할 수 있는 작은 변수들은 무시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만, 생명을 다루는 데 있어서 작은 변수들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큰 걸 얻기 위해 사소하고 작은 것들은 희생하고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더 높은 고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도태하지 않으려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정도쯤은 감수’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중요한 것을 위해 중요하지 않은 것을 포기해야 함은 마땅하다. 문제는 작다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고, 크다고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급급한 것들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사실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작지만 매우 중요한 것들을 자주 놓쳐버리고 무시해 버리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생명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는 작고 사소한 변수들을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예수가 그렇다. 예수는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양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찾아 헤맨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가 아니고, 효율성의 원리도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원리이다. 생명의 원리는 아무리 작아도 애정으로 진지하게 바라보고 무시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나는 다시 이 사건을 생각해본다. 그 당시 어린이집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산책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산책 중이었던 아이는 스무 명이었고, 교사는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한 명의 교사가 살아 생동감 넘치는 스무 명의 아이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많은 아이들을 통제할 교사가 한 명뿐이었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중요한 질문은 그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있어서 무시한 작은 변수들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정책적으로, 효율성의 원리 안에서, 운영규칙상 작고 사소하고 무시될 수도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땅의 많은 아이들이 무방비 상태로 이런 환경 가운데 노출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시되기 일쑤이고, 편리하고 효율적인 방식과 어른들의 눈높이와 이해 범위에 만족할만한 것들을 자본이라는 날개를 달아 활개 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생명을 다루고 있더라도 생명을 생명답게 보는 눈과 마음이 없다면 결국 우리의 가르침은 ‘관행’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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