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복숭아 향수
스무 살 서울에 상경하기 전에는 소도시에 살았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드넓은 복숭아밭이 있었다. 가끔 주말에는 집 근처 승마장에서 밖으로 나와 말을 타고 산책하는 사람이 보이고 여름철이면 엄마랑 걸어서 과수원 직판장으로 맛있는 복숭아를 사러 가곤 했다.
그 시절 고등학생이던 나는 여름이 오면 매일 아침 복숭아 향이 가득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과수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려면 40분 거리, 버스도 제때 오지 않아서 삼사십 분 기다리는 건 기본이다. 졸려서 눈을 반쯤 뜬 채로 기다리면서도 늘 복숭아가 먹고 싶었다. 식욕이 넘치는 때라 오래 기다린 날은 못 참고 엄마에게 저녁에 먹을 복숭아를 사달라고 미리 부탁하곤 했다. 하루 종일 학교에 갔다 온 후 엄마가 주는 시원한 복숭아는 정말 꿀맛이었다.
지각을 면하려고 아침을 거르고 일찍 버스를 기다리거나 늦으면 택시를 타려고 노력했다. 지금처럼 카카오 택시를 쉽게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도 그 기다림이 꽤 즐거웠다. 늘 인적 없는 휑한 길이지만 매일 아침 일곱 시면 북적거렸다. 정류장 앞에 서있으면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동네 친구들이 더러 서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시끌벅적 친구들과의 대화는 동네 소식지와 같았다. 학교버스가 하나둘 오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인사말도 없이 서둘러 떠났다. 그 재밌던 시간도 입시가 바빠지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시작했다. 처음 보는 서울의 모습은 밤낮없이 어딜 가나 사람들이 있고 밝은 불빛이 있는 별천지였다. 차 없이 어디든 대중교통으로 쉽게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강남역에 가서 더 이상 두리번거리지 않게 되고 편리한 지하철을 타는 게 당연해질 무렵, 나는 더 이상 기다리는 걸 즐거워하지 않았고 많은 것들을 잊고 살게 되었다.
하루는 출근길에 나와 지하철 유리문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서서 졸린 눈을 껌뻑이며 폰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앞에 서있는 아주머니 한분이 복숭아 한 봉지를 무겁게 들고 계셨다. 문이 열리며 불어오는 바람에 복숭아 향이 스치는 순간, 정다웠던 동네와 그 여름날의 짙은 복숭아 향이 생각났다.
화장품 가게에서 파는 코 끝을 찡하게 하는 핸드크림 같은 냄새가 아니다. 오로지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향은 비 오는 날 저벅저벅 흙밭을 걸어가 풀냄새를 맡으며 나무에 달린 복숭아 한알을 쥐고 한입 베어 문 것 같은 달콤한 냄새가 있다. 시끄러운 친구들 목소리, 꿉꿉한 비 냄새, 비에 젖어 진해진 흙과 풀 그리고 복숭아 냄새. 엄마랑 먹던 물이 많고 달콤했던 물렁한 복숭아의 단 냄새가 진동했다.
후각에 연계된 기억은 감정을 동반한다고 한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이 찻잔에 섞인 마들렌 부스러기를 먹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과거를 떠올린 것처럼, 복숭아 향을 맡은 순간 짧은 순간 파노라마처럼 많은 것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꿈에도 몰랐던 잊힌 기억들 속에 복숭아밭과 친구들, 그리운 집 그리고 엄마. 소중한 것을 많이 놓치고 살고 있었다.
짙은 복숭아 향이 주는 기분 좋은 쾌감 함께 현재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눈깜짝할새 십년이 지나있었다. 지금 나는 잘 사는 걸까? 오늘은 엄마에게 꼭 전화해야지. 내가 가진 것들을 더 감사히 여겨야겠다. 왠지 모를 그리움에 복숭아 밭에서 아직 그 냄새가 날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