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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미 Sep 15. 2019

아가타 쥰세이에게

Florence, Italy, Europe

땀을 흘리며 몇백 계단을 필사적으로 오르면 거기에 기다리고 있을 피렌체의 아름다운 중세 거리 풍경에는 연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미덕이 있다.


책은 예상치 못한 곳에 묻어있다. 충격으로 다가왔던 다자이 오사무의 책 '인간 실격' 표지에는 에곤 쉴레의 그림 '자화상'이 있다. 대인기피증의 시선이 담긴 글은 내 마음을 흔들어, 표지 그림에 관심이 가게 했다. 28세에 요절한 그는 어딘가 다자이 오사무와 닮아 있었다. 우연히 도쿄 여행 중 신국립미술관에서 에곤 쉴레의 자화상 그림을 마주하였다. 그의 그림은 나에게 페인팅된 유화도, 인상적 화풍도 아니었다.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의 번뇌가 담긴 190페이지 분량의 활자였다.


숨 막히는 호흡으로 읽어나간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 피렌체도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살이 익는 뜨거운 햇볕 아래 두우모 광장에 앉아 쥰세이와 아오이의 사랑을 떠올렸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두 권의 공동기획 소설이다. 츠지 히토나라작가는 쥰세이의 관점으로 '블루 Blu'를, 에쿠나 가오리작가는 아오이의 관점으로 '로소 Rosso'를 연재했다. 쥰세이의 직업은 그림 복원사.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린다. 그는 8년간 과거에 머물며 아오이를 그리워한다. 아오이는 균형 잡힌 삶과 미래를 바라본다. 쥰세이에 대한 마음이 강해질 때면 현실에 냉정해진다. 그녀는 쥰세이로 인해 연인 '마빈'의 마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Blu 아가타 쥰세이
나의 광장. 예전에 그렇게 부르며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다.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떠돌며 살아가던 내게 있어 그녀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도시의 광장처럼 시원스런 존재였다. 별다른 용건도 없이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노인처럼 매일 그곳을 찾아갔다.


미술품 복원사인 쥰세이는 ‘과거’에 대해 생각한다. 세대를 거슬러 올라온 미술품, 하나의 미술품을 관리하기 위해 여럿 바뀐 사람들, 그리고 아오이. 쥰세이는 10년 후 아오이의 생일날 피렌체 두우모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떠올린다.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상욱 시인의 ‘그리운 건 그때일까, 그대일까’ 구절처럼 쥰세이가 그리워하는 것이 아오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운 건 그대가 맞았다. 쥰세이는 아오이에게 편지를 부치고 전화를 걸며 그녀를 열망했다. 10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한 사람을 가슴에 묻고 사는 그의 사랑은 부러우면서도, 애처로웠다. 그녀는 오래전 떠났기 때문이다.


Rosso 아오이


나는 쥰세이의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강변길에서, 기념 강당 앞 돌계단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도중에 있는 찻집에서, 우리들의 방에서. 쥰세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누구에게든, 당황하리만큼 열정을 기울여 얘기했다. 항상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했고, 그 이상으로 이해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 싶으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버리곤 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다는 듯, 그리고 느닷없이 나를 꼭 껴안곤 했다. 나는 쥰세이를, 헤어진 쌍둥이를 사랑하듯 사랑했다. 아무런 분별없이.


도쿄 대학 시절 아오이는 쥰세이를 사랑했다. 동급생들은 외국에서 온 그녀를 외부인으로 취급했지만 쥰세이는 달랐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던 아오이는 쥰세이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어나, 잠든 마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단한 턱, 짧게 돋아 있는 수염, 긴 속눈썹,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마빈, 지금, 내 눈앞에 있고, 나를 꼭 껴안아주는 마빈. 잠자는 마빈의 몸에 다리를 휘감고, 움푹한 어깨에 얼굴을 부빈다. 마빈의 체온, 마빈의 냄새. 마빈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파헤치고 들어오거나 모든 것을 알려 들지 않는다. 혼자서 점점 상처 받아 흥분한 두더지처럼 몸을 사리지도 않는다. 이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슬픈 얼굴로 내게 말없는 비난을 하지도 않는다. 비는 내게 도쿄를 생각나게 한다.


아오이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미국인 남자 친구 마빈과 함께 안정된 생활을 한다. 소설에서 마빈은 완벽한 연인으로 등장한다. 아오이는 마빈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여전히 쥰세이를 사랑한다. (위 대목에서 ‘도쿄’는 쥰세이를 뜻한다.) 마빈의 어디가 좋냐는 친구의 질문에 아오이는 생각한다. '공정하고 옳은 사람, 그리고 허벅지' 다른 답변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찾지 못한다. 아오이는 자주 악몽에 시달리고 잠든 마빈을 보며 미안함을 느낀다. 결국 아오이는 마빈을 떠난다.


마빈과 헤어지고 쥰세이와의 10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렌체행 기차를 타는 그녀는 비로소 마음을 인정했다는 해방감을 느낀다.


숨을 죽이고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하늘이 밝아 오자 비둘기 떼가 둥근 지붕 위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두오모 앞 광장에는 집시 부자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광장 한 복판 돌바닥에 앉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피렌체의 두우모에 올라가 붉은 지붕들을 바라본다. 예술과 건축, 문화가 있는 아름다운 거리에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가 있다. 에쿠니 가오리 작가가 써내려 간 아오이의 조용한 생활, 츠지 히토나라 작가가 적은 쥰세이에게 일어나는 불안정한 사건들을 다시 만났다. 책은 피렌체에 대한 낭만을 만들었다. 다음은 책이 어디에서 다가올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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