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다미 Oct 21. 2019

언어 장애인의 대화법

도끼병으로 마음찍기

스물한 살의 나는 공주병 말기 환자였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예쁘다로 착각했고, 모든 남자들은 나를 좋아한다고 믿었다. 그날도 쓸데없는 도끼병이 도졌다. 오후 수업이 있어 1시쯤 버스를 타니 자리가 많았다. 그나마 넓고 답답하지 않은 하차문이 열리는 자리에 앉았다. 이어폰을 끼고 한참 인터넷 쇼핑을 하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슬쩍 보니 멀끔한 차림에 머리도 단정한 남자였다. 남자는 핸드폰을 만지작하더니 조심스럽게 나에게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메모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제주대학교 경영학과 단이라고 해요. 친구 하고 싶은데 번호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렇게 번호를 물어보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고개를 들자 그가 미소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농아이신가?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일단 알려주지 뭐.' 단에게 핸드폰을 줘보라는 제스처를 하자 다이얼판을 열어 주었다. 번호를 찍어주니 단은 고맙다는 글자를 보여주었다. 버스는 학교에 도착했고 우리는 서로 꾸벅이고 헤어졌다. 수업 중 문자가 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학교에서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고 친구 해봐요. 이름이 뭐예요?' 홀드키를 눌러 그대로 문자를 씹었다.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 일하다 보니 그때 일이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도무지 나는 공주병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키스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마치 나를 덮치려 드는 사람처럼 대했다. 연애를 하고 싶어서일 수 있지만 친구가 되고 싶어서였다면 나의 도끼병이 그의 마음을 찍어 내린 것이다. 농아에 대해 알게 된 후로 단의 행동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용기였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 예스터데이처럼 농아의 세계에는 비틀즈의 렛잇비가 없다. 라면을 후루룩 불어도, 맥주를 키야 하고 마셔도 그들은 풍경에 산다. 농아는 의사소통에서 말을 듣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 즉 언어 장애인을 말한다. 언어 장애인은 광범위한 장애의 유형이다. 어느 정도 듣는 사람은 보청기를 통해 소리를 듣고 상대방의 입모양을 보며 대화한다. 이들 중에는 수화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난청이 심한 사람은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들어보지 못한다면 ‘ㄱ’이 대체 어떤 발음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발음기관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듣되, 말하지 못한다.


청각 장애인이 말을 배우는 이유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언어는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과정으로 배운다. 농아는 듣기를 건너뛰어 말하고, 읽고, 쓰는 데에 피나는 노력을 한다. 발음을 연습하고 책을 읽고 문장을 써내려 간다. 백 번 연습한 ‘맙은 머거어? (밥은 먹었어?)’라고 말했을 때 상대방이 알아듣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면 자신감이 떨어진다. 창피함에 입을 다물어 대화할 기회를 스스로 놓기도 한다. 읽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난독증 어린이 중 25%는 청력이 좋지 않다.


농아에게 비장애인 친구가 생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말과 수화. 서로 쓰는 언어가 달라 소통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에게는 농아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너는 내 앞에 있는데 온라인 채팅처럼 하루 온종일 자판을 두드려 가며 대화해야 하니. 이런 수고를 정기적으로 자진할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고 농아가 먼저 다가가기란 더 힘든 일이다. 친구 되자의 의미에는 ‘내가 말을 못 하는 걸 네가 불편하더라도 참아줘’라고 말하는 거니까. 하지만 농아도 문자로 대화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발음이 어눌한 사람들은 ‘모자라다’는 편견을 많이 받는다. 지난 겨울 기안 84의 복학왕이 논란이 되었다. 청각장애인에 대한 작가의 잘못된 편견이 만화에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기안 84가 그린 청각 장애를 가진 인물 주시은은 발음이 어눌하고 바보 같은 캐릭터다. 주시은은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미련한 판단을 내려 독자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주시은이 등장한 매 화마다 ‘청각 장애인이 발음이 어눌하다고 사고 능력까지 낮지 않다.’는 댓글이 달렸고 나는 그 논란이 고마웠다.


단을 다시 만난다면 그와 기꺼이 친구가 되고 싶다. 내가 라면을 후루룩 먹는 것과 맥주를 키야 하고 마시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단이 라면을 먹는 것과 맥주를 마시는 걸 보고 싶다. 우리는 단의 언어인 수화로 대화할 수 없겠지만 나의 언어인 말로도 대화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렴 우리는 문자로 대화할 것이다. 단에게 나도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답장이 너무 늦어 미안하다 전하고 싶다.



* 우리가 흔히 쓰는 '벙어리’라는 단어는 언어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벙어리장갑도 마찬가지다.

* 아래 기사는 최근 농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육 문제에 관한 기사다. 누군가는 귀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막연한 바람으로 링크를 첨부해 두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0011502091887?did=NA&dtype=&dtypecode=&prnewsid=


작가의 이전글 세상은 요지경 돌고 도는 내 인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