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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미 Nov 04. 2019

아를의 붉은 포도밭은 검다

부채로 불을 끈다던가, 사포로 연필을 깎는 다던가. 어처구니 없는 일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완전히 시력을 잃은 전맹은 대학생활에서 자주 부채와 사포를 쥔다.


08:20 AM

진동이 울린다. 찬영이다. “어.. 여보세요?” 찬영은 금방 일어난 걸 눈치챘을 것이다. “아침부터 미안. 바뀐 강의실 경상대 1호관 맞아? 택시 부르려고 하는데 기억이 잘 안 나서” 휴대폰 문자를 뒤져 확인한다. “맞아 찬영아. 이제 출발해? 응 알겠어. 기다릴게.”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에 검정 반팔을 입고 후다닥 세수를 하고 나온다.


기숙사에서 15분 정도 걸어 경상대 1호관에 도착했다. 나무 의자 앞으로 장애인 콜택시가 멈춰 선다. 오른쪽 뒷문이 열린다. 찬영이 택시 몸통과 문을 손으로 짚어가며 나온다. 찬영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내 왼쪽 팔에 올린다. 찬영의 두 손이 내 팔을 꽉 쥐어 팔짱을 낀다.

출처 구글

강의실에 들어가니 수업이 시작했다. 교수님이 다음 달 발표할 조별과제 회의 시간을 준단다. 팀원들은 찬영을 보더니 다가와 앉는다. 주제는 ‘제주도내 다문화 가정의 문제와 해결방안’이다. 역할을 나눴다. 나와 A는 대학서적, 통계청, 논문, 구글을 통한 자료 조사를 맡았다. B는 자료를 검토한 후 사진과 그래프를 배치하는 PPT 제작을 담당했다. 하는 수 없이 찬영은 발표를 맡았다.


발표를 맡은 찬영에게 PPT를 한글 파일로 옮겨 USB에 담아줬다. 슬라이드 각각의 설명과 함께 그래프와 사진은 글자로 풀어 적었다. 시각자료를 시각 장애인이 설명해야 한다니 이상한 일이다.


발표날 찬영은 강의실 앞으로 짐작되는 곳에 선다. 탁, 핸드폰을 내려놓는 소리. 드르륵, 의자 소리. 침묵. 찬영은 오른쪽 어깨에 멘 점자 기기를 내려놓는다.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검지와 중지로 은색 점들을 짚어간다. “왼쪽 그래프는 교육 센터의 자료입니다.” 그래프는 오른쪽에 있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찬영이 점자를 읽는 동안 팀원이 대본에 맞게 슬라이드를 넘긴다. 찬영은 눈 앞에 있는 학생들의 표정을 모른다. 다음에는 발표 방식을 바꿔야겠다.


목요일 8교시, 기말고사 마지막 시험이다. 이번 시험만 보면 종강이다. 그런데 웬걸. 교수님이 찬영의 시험이 담긴 usb를 잊었다. 교수님의 곤란한 얼굴은 나와 찬영을 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학생, 미안한데 아이들 시험 보고 나가면 찬영이한테 시험 문제 읽어주고 답한 것 좀 적어줄 수 있을까? 객관식은 빼고 주관식이랑 서술형만 부탁해”


점자기를 챙겨 온 찬영은 모든 학생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꼬박 두 시간을 기다렸다. 하필 문제의 단어가 어렵고 문장이 길었다. 찬영이 기억할 수 있도록 빠르게 읽었다.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찬영은 “다시”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천천히 읽었다. “미안, 다시” 문단의 호흡을 살려서 읽었다. “다시” 여섯 번째 문제를 읽었을 때 찬영이 오답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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