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연습_3

3화. 합격하면 다 행복할 줄 알았지.

by 김지유

"최종 합격하셨어요."

과장님의 쿨한 한마디가 복도에 툭, 떨어진 다음 날이었다.


정식 발령, 첫 출근 날 아침.

새벽 다섯 시.
잠에서 깬 것도, 깨고 싶어서 깬 것도 아니었다. 그냥 눈이 떠졌다.

커튼을 걷지도 않은 채, 옷장 앞으로 갔다.


수백 벌은 될 법한 옷들 사이에서 무엇을 입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 있었다.

20대에는 매일매일 스타일링하는 게 그렇게 즐거웠는데,
지금은 그냥.

'제발 튀지 말고, 평범 하자.'

그 마음뿐이었다.


교생실습 첫날에 입었던 검은색 정장을 꺼내 입고,

새로 산 플랫슈즈를 신었다.
예전 같으면 10센티 넘는 하이힐을 망설임 없이 골랐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무릎이 아프고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할 체력을 걱정하는 서른 살이었다.


대문을 닫고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잘해, 김지은."

혼잣말이 나왔다.


피곤에 절은, 그러나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목소리였다.

출근길 9호선 지하철.
어깨에 어깨를 부딪히며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작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Lo-fi 재즈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마음은 더 요란하게 긴장했고

손바닥에는 미세한 땀이 배어 있었다.


회사에 도착했다.
출근 입력기에 지문을 찍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학원 건물 안, 쉴 새 없이 오가는 사람들과 덜컹거리는 복사기 소리, 전화벨 소리.
모든 소음이 얇은 유리막처럼 내 귀를 감쌌다.


데스크에 앉아있는 행정팀 직원중, 가장 덜 바쁜 표정의 사람에게 다가 갔다.


"안녕하세요, 오늘 2학년 8반 첫 발령받은 김지은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강의실 안내해 드릴게요."


608호.

'김지은 TR'이라고 붙어 있는 강의실.

'멋있어. 내 이름이 붙은 넓은 강의실이라니'

잠깐, 마음이 뭉클했다.


일부러 출근시간 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왔는데,
대형 어학원 일이 처음인 나는 준비할 게 산더미 같았다.


'미리 만들어 놓은 자료 수정하고, 숙제장 만들고, 워크북 출력하고, 단어 시험지도 출력하고, 진도표도 만들고...'

수업 시작 전까지 밥 먹을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가방 속 비상용 간식, 쿠키를 입에 넣고 정신없이 타이핑을 하고 있을 때,


같이 면접을 봤던 미국 교포 선생님이 내 강의실로 찾아왔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영어로 말했다.


"Congrats, 지은! 살아남았네! 앞으로 잘 부탁해."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도 여기 캠퍼스 발령받으셨어요?"

내 웃음은 부자연스러웠다.
그녀의 유창한 영어가 다시 한번 내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608호.
내가 맡게 된 반은, 8개월 동안 선생님이 세 번이나 바뀐 문제의 반이었다.

'3명의 선생님이 야반도주해서 내가 4번째 담임인 중2-8반.'


수업 시간이 다 되어 교실 문을 열자, 아이들이 삼삼오오 떠들고 있었다.

"야, 쌤 왔다."
"어디, 어디?"

아이들은 나를 힐끔거렸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야, 여기 학원은 선생님 얼굴 보고 뽑나 봐.
쌤, 진짜 예뻐요."

교실 한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쌤 몇살이에요? 스물네살이죠!"

"야 아니야 20대 초반이야"

"멍청아, 쌤인데 대학은 졸업했을 거 아냐"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경계심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안녕, 오늘부터 너희랑 한 배를 타게 된 김지은 선생님이야.

그리고 나 나이 많~아~"

그리고, 바로 이어진 질문.


"쌤, 근데 쌤도 우리 버리고 가실 거예요?"


아이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작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
나는 그 웃음 뒤에 숨은 상처를 보았다.


근엄한 표정으로 교탁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아니. 난 너희랑 끝까지 갈 거야."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우리가 탄 배는 방금 출발했고, 우리 앞엔 바다밖에 없어.

같은 배 탔으니까, 이제 우린 남은 중2 항해를 잘 끝내야 해.

선장 잘 부탁해. 선장도 너희를 도와줄게."


긴장의

첫날이 끝나고, 밤 10시 30분.


팀장님과 면담하고, 수업 피드백과 전달사항을 듣고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아침에 힘찬 걸음을 비웃는, 질질 끄는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엄마가 졸린 얼굴로 나왔다.

"지은이 왔니."

"응, 엄마 나 왔어. 배고파."

"밥이랑 국 데워서 먹어."

"응, 고마워. 얼른 자."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이었다.
부엌에 혼자 앉았다, 전자레인지도 귀찮아 그냥 차가운 밥과 국을 퍼먹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그래도, 먹고는 사네.'


어디서도 듣지 못한 '오늘 수고했어'를 대신해,
나는 후식으로 쿠키 하나를 꺼내 우걱우걱 씹었다.

조용한 부엌에, 작은 기분 좋은 소리가 퍼졌다.


밤 12시 30분에

저녁 식사를 하고, 사회를 벗고, 리무버로 사회 생활을 지우고,

말끔히 하루를 다 샤워 한 후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늘 하루를 채운 작은 일들이 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처음으로 내 이름이 붙은 강의실.
아이들과 주고받은 첫 농담.


가방 속에 쑤셔 넣은 쿠키 부스러기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오늘, 해냈네."


방 안은 고요했다.


말하고 나니 가슴 깊숙이 쌓인 무게가 조금 더 내려앉았다.


그 뒤에 따라온 생각.


'나는 최선을 다 해서 살았는데,
결국 꿈꿨던 서른 살이 되지 못했어.'


어렸을 때 그렸던 미래의 청사진은
지금의 내 모습과는 달랐다.

씁쓸했지만,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비록 지금의 내 서른 살은
바라던 이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 작은 성과들이,
언젠가는 나를 성공이라는 이름의 어딘가로 데려다 줄지도 모른다.


방 안을 가득 메운 생각은
아무 대답 없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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