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발령 한 달 차. 피로의 법칙
4화. 발령 한 달 차. 피로의 법칙
첫 발령 이후 한 달 동안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우면, 내일 해야 할 업무들이 생각났고,
눈을 감으면, 칠판 분필 가루가 손끝에서 스쳤다.
머리를 비우려고 캄캄한 도화지를 끌고 오면 아이들이 복도에서 떠들던 소리가 희미하게 다시 들려왔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가,
다시 천장을 올려다봤다.
'제발 좀 자 라.'
몸은 천근 같았지만,
다음 하루는 별 수 없이 오고 있었다.
아침 다섯 시 오십팔 분.
휴대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눈을 감은 채로 이불속에서 두 번 몸을 말아도,
일어날 시간은 밀려오고 있었다.
"으으......"
거울 속에는 잔뜩 부은 메기가 한 마리 있었다.
물기를 적신 손으로 뺨을 몇 번 두드려도,
피로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
대충 파운데이션을 두드리고,
어제 묶었던 고무줄로 다시 머리를 묶었다.
대충이라는 말조차 아까운 수준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사람들, 내 얼굴 안 봐.'
'내 얼굴 말고, 실수만 안 보면 돼.'
지하철 9호선, 출근길.
몸을 기댈 자리조차 없는 만원 지하철에서
나는 작은 핸드백을 가슴에 끌어안고 버텼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지만,
누가 밀어도, 부딪혀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 아침을 지탱하는 수많은 인간들 틈에서.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었다.
'오늘 유난히 더 못생겼네. ...'
그래도 출근은 하고 있다.
살아서 하고 있다.
대치역 3번 출구 스타벅스에 서서 나는 매일 같은 주문을 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벤티에 샷 추가해 주세요”
‘생명수에 생명 한 번 더 추가요’
지문 찍으며 출근 입력 하고, 강의실에 올라왔는데 커피와 가방을 내려놓을 틈도 없이 교실 전화벨이 쏟아졌다.
띠리 리리-
“네! 김지은입니다”
"선생님, 5분 후에 회의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띠리 리리-
“넵! 김지은입니다”
"선생님 저 김미영 팀장이에요, 있다가 회의 들어오실 때 지난 중간고사 해설지. 아, 다 끝났죠?"
“네 다 마무리되었습니다!”
거 짓 말.
“들고 오세요”
‘망했다. 프린트아웃 안 했는데, 그리고 이거 오늘까지 제출 아니잖아!’
가방을 내려놓을 틈도 없이,
나는 교재 뭉치를 끌어안고 컴퓨터를 켰다.
오탈자 수정할 틈도 없이 프린트아웃 해서 회의실로 들어갔고, 역시나 몇 분 늦은 탓에
모두가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8시 10분. 회의.
8시 30분. 회의 끝
수업준비 시작.
8시 40분 오늘 알림장 만들어서 출력, 복사.
8시 50분 오늘 단어 시험지 출력, 복사.
9시 행정팀에서 전달준 학부모님 전화 call back.
9시 20분. 수업 시작.
10분 단위로 쪼개진 하루가
내 등을 끝없이 밀어냈다.
그렇게 오전 수업을 다 마치고 1시간의 점심시간이 시작되었을 때, 선배 선생님 중 한 명이 내가 오전 회의시간에 배포한 중간고사 해설지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왔다.
“쌤, 정신 하나도 없으시죠, 다름이 아니라 이거 서식 다 틀려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하셔야 될 것 같아요”
나는 얼굴이 빨개졌고, 그 선배 선생님은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중간고사 해설지 만드는 양식을 처음으로 알려주었다.
“이거 받으시는 선생님들이 단-양으로 돌렸을 때 페이지가 깔끔하게 넘어가도록 홀수 짝수를 맞춰야 되거든요? 그래서 챕터마다 1페이지가 오른쪽에 오게 홀짝 맞추셔서 A4용지를 끼워 넣어야 하고, 표지랑 동일한 겉 커버를 A4용지 반 크기로 다시 복사를 해야 되는데, 이 복사 방법은 50% 비율로 축소해서 겉 커버를 만들고 그다음은… ...”
그다음부터는, 아프리카어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못 외울 것 같아서 급한 대로 손등에 볼펜으로 막 적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복사 방법들은 너무나 어려웠고, 50분 동안, 나는 선배 선생님께 양식 맞추는 법을 세 번이나 ‘빠꾸’ 받고 나서야 제대로 된 완성본을 만들 수 있었다. 드디어 통과했을 때.
"쌤 정말 감사해요! 아무도 안 가르쳐 주셨는데 가르쳐 주시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다음에 제가 커피 살게요. 쌤 스벅 커피 뭐 좋아하세요?"
"전 자바칩 프라푸치노요. 휘핑크림 추가하고 캐러멜 드리즐 추가한걸로요!"
"네!"
내 강의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터벅터벅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은 끝이 났고,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오후 수업이 시작 됐다.
밤 10시.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같은 학년 선생님들 퇴근하기 전에 수정본을 돌려야 했다. 우리 층 복사기 7대를 동시에 돌리면서 최대한 빠른 작업으로 커버용 종이를 접고, 제본을 만들어서 우리 층 강의실을 돌기 시작했다.
“쌤~ 제가 오늘 아침에 드린 해설지, 양식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수정본 드리려고요, 제가 아침에 드린 건 폐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래요? 네 감사합니다”
나의 수정본을 받아 든 선생님들은
‘아 틀린 데가 있어? 난 보지도 않아서 몰랐네’
라는 표정이었다.
같은 멘트를 열두 번 정도하고 나니 드디어 팀장님 강의실에 가게 됐다. 확인 또 확인. 떨리는 마음으로 팀장님 강의실에 갔으나 팀장님은 벌써 퇴근을 하셨고,
나는 책상 위에 아주 반듯하게 칼 각 잡은 중간고사 해설지를 올려두었다.
"아….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네…."
해설지 양식 수정하느라 아이들, 성적발송, 숙제 점수 발송 등을 하나도 못한 탓에 나는 결국 밤 11시에 업무를 마무리 했다.
밤 11시 30분.
나는 대치역 플랫폼 의자에 앉아서 차가운 편의점 김밥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지만, 내 자신이 성장하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래 난 성장의 아이콘이야.'
하지만 그 성장의 아이콘은
매일 회사의 유리문을 밀 때마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실수할까 봐, 누군가 또 지적할까 봐.
그래도 나는 매일 그 문을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