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입사 육 개월 차.
셔틀버스 도착할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강의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 반 여학생 한 명이 나에게 엄청난 크기의 음료를 내밀었다.
“쌤! 이거 제가 쌤 드리려고 일빠로 셔틀 내려서 샀어요!”
“어머, 이게 뭐야? 진짜?”
나에게 음료를 내밀며 쑥스러워하는 여학생 옆의 친구가 말을 이었다.
“쌤 얘가 쌤 식사 못하신다고 여기에 토핑 다 때려 넣었어요!”
나는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음료를 받아 들며 소리쳤다.
“장해인 미쳤나 봐! 너 용돈 부자야? 이거 얼마나 비싼데! 진짜 나 사주는 거야?
뭐야… 진짜 너무 감동이야 힝… 이거 아까워서 어떻게 먹어!”
얼굴이 발개진 해인이 옆에서 친구가 한번 더 거들었다.
“쌤 장해인이 쌤 너무 좋다고, 자기가 쌤 짝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어요!”
“야 하지 마!!”
까르르 까르르 울리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힘들었던, 그날의 나를 살렸다.
이튿날에는, 남중만 있는 2교시 수업시간에 한 남학생이 붕어빵 봉지와 박카스 한 병을 내밀었다.
“오다가 주웠습니다. 쌤 슈크림 안 좋아하신 대서 팥으로만.”
나는 행복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 이준서~ 진짜 주웠어? 에~~ 주운 거 아닌 거 같은데?
대박 ~따뜻해! 올해 내 첫 붕어빵이야! 근데 ~ 우리 준서 오늘 단어는 다 외웠어?”
“죄송합니다 쌤 무릎을 꿇겠습니다”
“야 너 단어 못 외워서 이거 사온거지! 너 그래도 재시 보러 주말에 와야 돼!”
옆에 그의 친한 친구가 말을 덧붙였다.
“쌤! 얘가 이거 쌤 드린다고 붕어빵을 패딩 안에 안고 왔어요!”
나는 말했다.
“준서야~ 이 정도 정성이면 어젯밤에 단어를 외웠겠어~ 우리 같이 붕어빵 먹으면서 재시 보자~”
그 반의 남학생들과 나, 모두가 함께 웃었다.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그 순간들이 나를 버티게 했다.
아이들과 나는, 선생님과 학생이 아니라 전우였다.
그렇게 행복한 수업시간이 이어지던 어느 날,
탕비실에서 편의점 샌드위치를 마시고 있던 나에게 꽤 연차 높은 선배 선생님이 말을 걸었다.
"지은 쌤, 요즘 애들한테 인기 많던데?"
"진짜요? 설마요."
나는 웃었다.
"아니야, 애들이 쌤 얘기 엄청 해. '김지은 쌤 수업 재밌다'라고."
나는 괜히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작지만,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
아무도 몰래
내 인생을 조용히 붙잡아주는 순간들.
밤 11시, 강의실을 나설 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오늘 하루,
단 한 번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잘하고 있는 걸 지도.'
나는 씩씩하게
불이 다 꺼진 어두운 복도를 지나갔다.
창문 너머로
대치동의 밤거리가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그 밤거리는 6개월 전 나를 떠올리게 했다.
신입 교육 중 저녁 식사 시간, 혼자 학원 건물 옥상에 올라간 날이 있었다. 그 옥상에서 홀로 서있던 나는, 각종 고층 아파트들의 불빛에 둘러싸여 압도당하고 있었다.
서른 넘어 부모님 집에 얹혀 사사는 내 눈엔,
그 모든 반짝이든 집들은, 내가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빛났다.
나는 그 빛나는 아파트들에 쌓여 편의점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내가 꿈꾸고, 바랬던 서른 살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근데 왜 이것도 힘이 드냐…’
그 후로 6개월이 지난 지금
그저 어딘가에 내가 소속되어 있는 것
그걸로 자기 위로가 되었다.
일도 어느정도 손에 익어 갔다.
나는 언제나 아이들 눈빛을 잘 읽었다.
수업이 지루해질 때쯤, 아이들이 어디서 힘들어할지,
어디서 집중력이 흐트러질지, 2시간 30분 러닝타임의 수업을 디자인할 때부터, 모든 게 눈에 선 했다.
아이들이 즐겁고 힘든 수업을 듣고 하원한다는 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매번 학부모 전화 상담 때마다. 쏟아지는 찬사와 긍정적 피드백은 나를 더 신나게 했다.
비록, 내 몸은 망가져 가고 있을지라도.
아이들과 주고받는 이 작은 감정과, 애정이
내가 살아 있는 증거 같았다.
어느 토요일 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홍대 작은 와인바에 앉았다.
좁은 테이블 위엔 치즈 플래터와 와인잔이 빼곡히 놓였다.
"지은아, 너 얼굴 완전 말랐다. 회사 생활 그렇게 힘들어?"
친구 민아의 걱정 섞인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힘들긴 한데, 애들이 예쁘게 봐줘서 견딜 만해.
나 붕어빵도 받고, 음료수도 얻어먹는 인기 강사야."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소영이가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뭐야, 너 드라마 찍어? 진짜 학교 2020네.
나도 남자친구 말고, 애들이랑 지지고 볶는 거 해볼까 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혜진이는 웃다가 와인을 흘릴 뻔했고, 민아는 휴지를 건네주며 치즈를 입에 넣었다.
"근데 지은이 진짜 멋있어졌다. 예전엔 좀 툭하면 울고 불던 애였는데.
다들 어른 되긴 하는구나."
나는 민망해져서 와인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야, 나 아직도 집 가는 길에 종종 울어. 오늘만 예외야."
테이블엔 또 한 번 웃음이 퍼졌다. 창밖에 비친 홍대의 네온사인이 반짝였고,
나는 이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돌아오는 택시 안, 창밖을 흐르는 도시의 밤이 편안했다.
나는 조용히 창문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그래, 이 정도면 진짜 괜찮은 거지."
서울의 야경이 오늘따라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