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전 남자친구한테 연락이 올 때마다.
밤 11시 46분.
카톡 알림음 하나가 방 안을 울렸다.
“지은아, 잘 지내?”
그 한 문장이, 오늘 하루를 조용히 정리하던 내 방에
조금도 조용하지 않게 들어왔다.
커튼 틈으로 흘러들던 도시의 소음조차 순간 멈춘 것 같았다.
발신자는
전 남자친구.
순간, 그를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심장이 이상하게 떨렸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이미 헤어진지 오래인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를 만날때의 나는 서른 둘 이었다.
결혼, 커리어, 연애, 자아실현.
모든 게 곧 될 것만 같은 나이였다.
실은 그게 함정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15살 무렵부터 내 삼십대를 계획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여의도의 고층 아파트.
멋진 남편, 토끼 같은 아이 둘, 그리고 워킹맘.
‘멋지다’는 말의 정석 같은 여자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 서른셋.
전세는커녕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사교육 전쟁터 대치동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다.
내가 꿈꿨던 삼십대 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
SNS에선 내 나이에 다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데
난 뭐하고 있지...
열정은 20대에 다 써버렸고,
지금은 아메리카노 색의 다크서클과 함께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그가 갑자기 왜 연락했는지는 모르겠다.
'떠난건 내 선택'이라고 했던 그 인데...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읽지도 못하고 그 ‘빨간 1’을 바라만 보았다.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고
잠잠해질 것 같았던 감정은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
나는 연애도 썸도 하나같이 다 망했지만.
그래도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연애든 썸이든, 관계가 끝난 후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가 돌아온다는 것.
너를 못 잊겠다’, ‘다시 만나자’는 말이
반드시, 불쑥 찾아온다.
한 달, 1년, 혹은 1년 반이 지나도. 100%의 확률로.
나는 다시 연락을 받는다.
누군가는 미련으로, 누군가는 외로워서, 누군가는 정말 나를 잊지 못해서,
누군가는 단지 내가 궁금해서.
그렇게 ‘반드시 다시’ 연락이 온다.
나는 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지 안다.
내가, 진심으로 그들을 대했다는 걸, 그들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아낌없이, 진심으로, 바보같이.
그래서 그들은 시간이 지나고 깨닫는다.
자기 마음을 그렇게 깊이 알아주는 사람은 흔치 않다는 걸.
그래서 김지은의 문을 다시 두드려본다.
찔러보는 걸 수도 있고, 진짜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이 나를 아는 것처럼, 나도 그들을 안다.
그래서 “잘 지내?”라는 같은 문장을 받아도
어떤 사람은 웃기고,
어떤 사람은 화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아프다.
‘웃겨, 얘 또 여기저기 후비고 다니나 보네. 불쌍해라.’ 또는
‘아, 내가 이 쓰레기를 아직도 차단을 안 했어? 김지은 미쳤네’ 또는
‘왜 하필 지금이지?....
내가어떻게 버티고 있는데.
나는 그 사람 없이 잘 살기 위해 내 하루를 다 쓰는 중인데.
그 사람을 잊기 위해 내 모든 걸 다해 최선을 다 하는 중인데…
너무했다…밉다... 남의 속도 모르고….’
11시 46분의 그는, '세번째 감정이드는 사람'이었다.
산산조각 난 접시를 붙인다고
다시 쓸 수 있는 건가.
붙일수록 예뻐지긴커녕
작은 충격에도 더 쉽게 깨질 텐데.
한 번의 재회가 서로를 가루로 만들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스물 아홉의 나.
깨진 접시 조각을 다시 붙여보려고 했던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다시 사랑하면,
지난 시간의 어긋남이 다 이유가 되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린
더 빠르게, 무너졌다.
전보다 더 못난 말들을 서로에게 쏟아부었고
전보다 더 심한 행동을 했다.
결국 서로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그때 나는
사랑도, 내가 누구인지도 다 잃었다.
그런 아픈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
그래서
11시 46분,
“잘 지내?”라는
그 짧은 말 한 줄에 대답을 하기엔
난 너무 멀리 떠나 왔다.
그러니까, 이건 단지 안부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자,
내 머릿속엔 다양한 장면들이
되감기처럼 다시 재생됐다.
엄마는 또 다른 선 자리를 만들어놨다.
“86년생이고 강남에서 병원 해.”
“에휴…”
“넌 안 늙을 것 같지?
여자 금방 늙어.
하루라도 젊고 예쁠 때 가야지.”
엄마의 말투는 언제나 나의 나이와 현실에
정확히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도, 거절도 없이.
시집을 가려는 노력에 최선을 다 해야 했다.
그래야 엄마가 나중에 “내 딸은 노력했는데 안 된 거야”라고 하실 테니까.
그리고 나도 내 인생에 후회가 없을 테니까.
소개팅 남은 말끔했다.
말 잘하고, 옷 잘 입고, 능력도 있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를 보는 눈에 온갖 계산이 오가는 걸
3분 만에 읽을 수 있었다.
“요즘 학원가는 어때요?”
“애들 수준은 점점 올라가죠?”
“펀드 같은 거 하세요? 저는 저희 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이번에 상장을 해서…”
나는 파스타 국물에 숟가락만 적셨다.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면접이었다.
“아, 나는 지금 이력서를 들고 나와 앉아 있구나.”
집에 돌아오는 길,
흠집 난 자존심을 덮으려 친구들 단톡방에 장문을 날렸다.
“야, 솔직히 그 정도 스펙이면 20대 연예인급 여자 만나야지.
도대체 날 왜 만나러 나와?
내가 남자여도 나같은 노처녀 안 만나. 시간 아깝게 도대체 왜 나오냐고.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냐고.”
내 친구들도 나처럼 이미 지쳐 있었다.
결혼정보회사, 소개팅, 정해진 대화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야 넌 그래도 넌 결정사는 안 갔잖아, 난 결정사에서 돈도 날려봤어.지긋지긋하다 정말”
어느 날은, 수업이 끝난 늦은 밤
한 학생이 오빠를 데려왔다.
“쌤, 저희 오빠가 쌤 실물 보고 싶다고 왔어요~”
“와, 실물이 더 예쁘시네요.
누나, 강의력 진짜 인정이에요.”
도대체 요즘 애들은 뭘 먹고 크길래
저렇게 다 키 크고 몸 좋고 잘생기기까지 한 건가.
에휴. 근데 누나든 쌤이든 너랑 연애할 시간은 없어…
“감사해요. 그런데 저를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제 친동생밖에 없어요.”
“그럼… 지은님?”
나는 빵 하고 터져서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설렘은 설렘일 뿐.
나는 지금 그 어느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 아이는 시작이고,
나는 거의 마지막 곡선을 도는 중이니까.
또다른 어느 일요일은 그냥
집에 있기 싫은 날이었다.
유기묘 봉사를 다니는 친구를 따라 이번엔 유기견 보호소 봉사에 다녀왔다.
하얀 푸들 한 마리가 내 무릎에 얼굴을 기대 왔다.
나는 얼떨결에 쓰다듬으며
‘름름이’를 떠올렸다.
내 강아지. 내 새끼.
내 유일한 위로.
“얘네는 사람보다 더 정직하죠.”
옆에 있던 수의사가 말했다.
그는 수려한 외모에, 하얀 가운이 잘 어울리는 눈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진료실 벽엔 ‘서울대 수의학과’ 졸업증,
그 아래엔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약력들.
그는 다른 봉사자들에겐 하지 않던 행동을 나에게 했다.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말도 걸고, 자기 주머니에 있던 초콜렛을 주기도 했다.
“커피 드릴까요?”
“어디 사세요?”
“여기서 멀지 않네요.”
“다음엔 언제 또 오세요?”
그가 다른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보이자
나는 잠깐 생각했다.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 안의 작고 쪼그라든 자존감이
말했다.
“착각하지 마. 저 남자가 너를 왜 만나.”
나는 개똥을 치우며
자꾸만 그 사람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왔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걸까.
나는 한때, 결혼이 사랑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늘 사랑이 하고싶었는데,
지금은 결혼과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두려움이 먼저 달려온다.
그렇게 지나간 과거를 회상해 보며
11시 46분의 메시지를 받고,
나는 잠 못 드는 밤의 일기를 썼다.
“나는 혼자인 게 괜찮고 싶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이라도 하고 싶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더 괜찮은 것처럼 만들어야겠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나에게 좋은 남자는 없는 것 같다.”
결국
나는 ‘잘 지내지?’라고 보내온 그 사람에게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 세 글자 안에,
내 마음이 또다시 부서질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