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좋아하는 방식으로

나는 여전하지만, 여전하여서

by 지하경

아, 정말 좋다 싶은 순간들.

좋아하는 날씨와 계절을 떠올리면, 특정한 하루가 아니라 하루 중 한 조각이 떠오른다. 시선이 닿는 즉시 별다른 설명 없이 좋다는 감정에 휩싸이는 순간들. 실은 그런 순간들이 더 많다. 그래서 그 순간들의 모음을 기록해 보고 싶었다.

이 글은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순간과 시선에 대한 기록이다. 시작에 앞서 고백하자면, 내 문장은 병렬로 긴 편이다. 갸우뚱하거나 지루할 수 있는 문장의 연속성 속에서, 틈틈이 숨 고르며 읽어주시길 바란다.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순간이 시선에 담길 때가 좋다. 놀이를 계획하며 나누는 대화 소리, 엉뚱한 대답 혹은 유난히 또렷한 발음을 뱉어내는 막내의 음성. 그 음성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나에게 옮겨올 때. ‘엄마가 제일 좋아’ 하며 안겨오는 보드라운 손길, ‘엄마의 수다가 듣고 싶어’ 하며 다정히 건네오는 말.

아이들의 시선이 서로에게, 혹은 나에게 닿을 때가 좋다. 서로의 머리를 빗어주고 외부의 소음이 차단된 듯 집중하고 있을 때. ‘이 꽃은 열려 있는 거야, 닫혀 있는 거야?’ 시든 듯 보이는 꽃을 보며 읊조리는 아이의 문장을 들을 때.

낮은 책장을 잡고 한 발로 버티며 다른 발을 높이 추켜올린 채, 발차기 흉내를 내느라 발끝까지 힘을 준 작은 발가락이 빨갛게 물들 때. ‘엄마 나 바바요.’ ‘나는 씩씩해.’ 그 말을 들을 때면 내 감정은 끝없이 번져 나간다.

매일 아침 초록의 그늘 아래를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시시한 어른으로 살아가는 오늘이 그리 싫지 않다는 마음이 불쑥 들어설 때. 고개를 숙인 채 걷다가 문득 허리를 펴려 멈추는 순간이 좋다.

운전 중 시선에 담기는 이팝나무 길, 건너편 언덕의 노란 꽃무리. 그 이름이 궁금해 안달 나다가 결국 모른 채로 남겨두는 마음까지도.

하늘의 표정이 또렷할 때, 구름의 변덕을 바라보다 실은 변덕을 부리는 쪽이 내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 때. 바람에 간질이는 나무들이 신이 나서 수다를 떠는 것처럼 느껴질 때.

먹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아침, 하루가 온통 오후 네 시쯤에 머무는 날. 비가 내리는 시작점을 찾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차가운 빗물이 팔에 닿는 감각. 텀블러에 가득 담기길 기다리는 커피, 막 내린 커피 향과 먹구름 같은 맛.

찬란한 햇빛에 초록이 더욱 반짝일 때. 너무 강렬한 더위에 나무들이 염려될 때. 치맛단이 바닥에 닿을 듯한 원피스를 입은 것 같은 나무를 마주할 때.

바람과 함께 걸을 때,

곁에 있으나 잡히지 않는 것들을 알아차릴 때.

겨울의 한가운데에 설 때. 눈이 내렸을지 기대하며 커튼을 열어보고,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걸 발견할 때. 그 눈이 나무에게는 어떤 감정일지 궁금해질 때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몹시 커져감을 느낀다.

문장을 적고 싶을 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한참 쓰는 중간, 마지막 문장을 적어 나갈 때. 머리가 아닌 손만이 창조해 내는 순간들.

도서관으로 향하는 걸음,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공간 특유의 향에 안도하는 마음. 책장 사이를 걷다 만나는 책등의 문장들. 가슴을 내려 앉히거나, 와락 안아주거나, 때로는 울게 만들고 조용히 내 편이 되어주는 문장들. 이쯤에서야 문장을 사랑하는 나의 방식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이의 취향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취향이 깃든 선물을 고르는 일. 아끼는 이에게 기쁜 일이 생기는 일.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 다 나열할 수 없는 지금이 좋다. 싫어하는 일을 곧장 떠올리지 않는 내가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지금 또한.

좋아하는 나를 탐구하는 일. 나를 더 좋아하려 애쓰는 마음.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책이 남아 있다는 사실까지. 이 모든 게 좋다.

좋아하는 일을 구체적인 이유로 더욱 좋아하게 되는 일은, 좋아하는 일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 나를 넓히는 일이다.
남들은 취향이라고 부르는 이 감정을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작은 균열에서 시작되어, 마음이 먼저 도달해 있는 상태.

호수 위를 지나는 바람에 밀려 쓱 넓어지는 물결처럼. 그걸 탐구할수록 나의 호수는 더욱 깊고 넓어진다. 그렇게 잔잔한 취향을 가진 어른이 되는 일.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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