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하루

나는 여전하지만, 여전하여서

by 지하경

일요일 아침, 느슨한 공기가 집안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마라톤 접수 후 실내에서 달리기 훈련을 시작했다. 어제는 가족 여행으로 운동을 하루 쉬었던 터라, 다시 뛰고 싶은 마음에 몸이 근질근질했다. 아침으로 두유 두 팩을 맛있게 해치우고, 일찍 잠에서 깨어난 아이에게 말을 붙였다.

“운동센터에 가서 엄마랑 같이 달리기 하고 올래?”

곧이곧대로 말하면 호응할 리 없으니, 바나나우유를 사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준비과정이 번잡하긴 해도, 언니와 동생 없이 둘째 아이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함께 집을 나섰다.


아직 이른 오전, 밖으로 나오니 길가에 눈이 한바탕 쌓여 있었다. 눈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느다란 침엽수의 초록 이파리 위에 쌓인 눈이 마치 쑥버무리 같아 보여 웃음이 났다. 이래서 겨울이 좋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다른 얼굴을 하는 계절이라니. 그저 넋 놓고 서서 눈을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차로 10분쯤 달려 운동센터에 도착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라 저렴하고, 수영장도 함께 있어 인기가 있다. 주차장은 늘 만차에 가까운데 운 좋게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주차를 하고 아이와 함께 1일 입장권을 구매했다. 카운터에서 사물함 키를 받으려는데, 동행한 아이를 보더니 초등학생은 입장이 불가하단다. 앞선 준비와 이동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혼자 와 운동을 할지 말지에 대한 갈등이 잠깐 스쳤다. 아이는 바나나우유를 얻지 못해 아쉬운 눈치였지만, 눈놀이를 하겠다며 금세 마음을 돌린 듯 보였다.


아이를 집에 내려주고 차를 돌려 다시 운동센터로 향하다가 커피 생각이 났다. ‘맛없컾’은, 주말을 특정한 세심한 규칙이 포함되어 있다. 이왕이면 맛있는 커피를 여유로운 시간대에 마시겠다는 호기로운 계획이랄까.


커피점으로 곧장 향했다. 문을 열자 매장 안에 갇혀 있던 커피 향이 허공으로 퍼져 나왔다.

‘아, 역시.’

향긋한 커피 향에 아침을 허비했다는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커피를 기다리며 통유리창 너머 눈 덮인 풍경을 바라봤다. 혼자의 시간이 생겼다는 사실이 오히려 좋았다.


커피를 들고 다시 운동센터로 향했다. 수영장은 몇 번 이용했지만 운동센터는 처음이라 시설 이용이 익숙지 않았다. 공용 탈의실과 운동시설은 층이 달랐고, 동선도 익숙지 않아 묻고 이동하느라 분주했다. 가방이며 운동화, 환복 할 옷에 커피까지 짐도 많았다. 체감상 입장권을 구매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운동시설에 들어섰다.


그런데, 트레드밀을 포함해 사이클과 천국의 계단까지, 목표했던 기구들 위에는 모두 사람이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별다른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이들은 일요일 낮 시간을 아무렇게나 허송하고 있었다. 마침 지루했던지 집안으로 들어선 나를 꽤나 반겼다. 거실 식탁에 앉아 새로 산 500장의 스도쿠 리필지를 꺼냈다. 한동안 난이도 5단계를 문제지를 푸느라 분투하다가, 다시 1단계 문제지를 마주하니 시시하게 느껴졌다. 다시 4단계부터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종이를 넘기고 있는데, 외출했던 첫째 아이가 돌아왔다.


아이 손에는 동그랗게 뭉친 단단한 눈덩이가 들려 있었다. 지갑을 두고 나가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언니 손에 들린 눈덩이 하나에, 갑자기 우리 집이 눈의 왕국이라도 된 양 아이들은 금세 들떴다.


아이도 나도 계획한 것 중 이룬 건 없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하루를 보내고도, 좋아하는 커피를 마셨고 아이와 헛웃음을 나누었으며, 운동은 못 했지만 몸은 쉬었다.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지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
나는 여전하지만, 여전하여서 좋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사이좋게 입춘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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